고(故) 전성호 6.25참전유공자회 명예회원

 

십여 년 전 밴쿠버 6. 25 기념행사에서 처음 스잔을 만났다. 팔십의 고령에도 꽃무늬가 있는 옷차림을 즐겨 입고 모자가 잘 어울리는, 시원한 웃음과 고운 눈매에 맑은 미소를 지닌 분이었다. 첫 만남 이후 함께 만나 식사하고 차와 담소를 나누던 어느 날, 스잔은 당신의 일대기를 독백처럼 들려주었다.

평남 평원이 고향인 스잔은 열다섯 살 때 일본에서 여학교를 다녔다. 해방 후 남북을 잇는 마지막 철도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해방은되었지만 거리에는 만세인파 만큼이나 걸인들로 넘쳐났고 아이들은 개울에서 가재며 물고기, 들에서 개구리, 메뚜기를 잡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그녀는 그나마 일본에서 공부한 덕에 간호사면허증으로 쌀 한 가마니도 안 되는 공무원의 월급으로 치마 단이 닳도록 입고 밥에 찬이라고는 새우젓이 전부였지만 그나마 없을 때가 더많아 허기를 물로 채우거나 누워서 보냈다.

군에서 육군병원을 창설하는데 간호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1948년 8월 26일, 스잔은 간호장교로 입대했다. 한국 첫 여군의 탄생이자 여성장교의 임관이었지만 먹고 살 걱정을 덜었다는 위안이 더 컸다. 군 입대로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을 무렵, 동료들과 영화 구경을 나서던 길 갑자기 부대로 복귀하라는 다급한 헌병들의 고함소리를 듣고 서둘러 대방동 육군병원으로 복귀했다. 6. 25가 터졌다. 다음 날 새벽 폭음소리에 놀라 일어나니 피범벅이 된 부상병들이 병원으로 갑자기 밀려들었다. 당시 병원 상황은 너무 열악해서 병실의침대를 다 치우고 마룻바닥에 환자들을 눕히고도 복도까지 부상병들이 즐비했다.

이튿날 지축을 흔드는 폭음과함께 한강다리가 끊겨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어. 다급한 상황이라 부상병들을 그대로 둔 채 걸을 수 있는환자들만 트럭에 올려 태웠지. 해마다 그 날이 오면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피범벅이 된 어린 병사들의 겁먹고 절망적인 눈빛을 뒤로 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 긴박한 순간이 여전히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아. 다리가 끊어지면서 후퇴하던 차들이 뒤엉키고 끊어진 다리로 추락하는 차량 행렬과 피난길에 올랐다가 되돌아가는 인파로 거리는 한 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어. 폭격으로 가족은 모두 흩어지고 연기 자욱한 폐허에 미친개들의 울음소리로 공포는 극에 달했어.

나는 수원도립 병원에서 수도육군병원으로 전속 명령을 받고 서울로 왔어. 그 긴박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부상병보다 사상자가더 많았지. 고개 너머 고비 같던 시간이 지나고 휴전이 됐어. 우리가 치른 6.25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씻을 수 없는 상처뿐이었어.휴전으로 38선이 생겨 국토는 반 토막이 나고 폐허와 이산가족으로 넘쳐났지.

휴전 후 외로움과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한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차선책으로
육군본부에서 근무하던 남편을 만나 서둘러 결혼을 했어. 하지만 가정에 무책임한 남편으로 인해 13년의 결혼 생활을 접고 두 아이를 데리고 나왔어. 당시 보건소에 다녔지만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1966년 나는 독일 간호사 모집에 끼어 그 해 7월 한국을 떠났어. 매월 월급을 타는 대로 보내주기로 하고 아이들을 맡겼지. 앉아서 두 아이들과 추위와 굶주림에 떨면서 살 수 없잖아.

독일에서 나는 산부인과병동에서 근무를 했는데, 당시 독일에는 기형아들이 많았어. 약물 때문인지 혀가 길고, 동물의 눈처럼 생긴 신생아의 모습도 봤어. 인큐베이터안에 있던 한 신생아는 뇌에 연한 막과 골이 그대로 보이고 볼에 눈이 달렸는데 1 주일 후에 죽었어. 이상하게도 가끔 그 모습이 꿈에 나타나곤 해. 다른 파독 간호사들이 겪었다던 병실 청소나 시체 씻기, 배식, 가사와 청소 등의업무는 안 했지만 서독 병원에서 봤던 기형아의 모습은 생애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각인되어 악몽처럼 꿈속을 배회하곤 했지.

내가 파독 간호사로 받은 월급은 고스란히 내 아이의 양육비로 보내고 삼 년의 계약이 끝나갈 무렵,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어. 나의 조국, 그 곳에는 꿈도 희망도 없었지. 칠흑 같은 어둠과 가난, 돌보아야 할 아이 둘, 전쟁 시 겪은 공포와 두려움, 남편으로부터 받은 상처와 아픔만이마음 안에 암처럼 퍼져 있었거든. 돈을 벌어서 아이들만이라도 굶주리지 않고 키울 수만 있으면 뭐든 해야했어. 고민 끝에 캐나다행을 결심한 광부와 함께 가기로 결심했어. 단지 돈이 없어서 선택한 길이었어. 토론토에 정착하여 함께 간 광부와 삼 년의 시간을 보냈지. 같은 처지로 서독 파견 근무를 했지만 서로 다른 환경에서 만나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어. 나는 돈을 버는 대로 아이들에게 보내야 했기 때문에 그에게 늘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고, 결국에는 손찌검으로 이어졌어. 하루도 성할 날이 없는 폭행으로 죽음보다더한 고통으로 시달리다 밴쿠버로 몰래 도망쳐 나왔어.

한국의 간호사 자격증으로는 병원은 취업도 못하고 최저 임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것조차 불가능했어. 다행히 일본 식당에서 종일 접시를 닦고 청소를 하다가 주방에서 요리 만드는 것을 배웠어. 작은 만두를 빚어 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구우면고향의 밀 냄새를 맡은 것처럼, 마당에 지핀 모깃불처럼 행복했어. 하지만 행복감도 잠시, 아이들에게 보낼 생활비를 벌지 못해 애가 타는 날이면 잠을 이를 수가 없었어. 휴일없이 일을 해도 겨우 방세를 내고 끼니를 메우는데 쓰고 나면 늘 빈손이야.결국 휴아이들의 생활비를 보낼 수 없어 이혼한 남편에게 아이들을 보냈어. 그 후로 아이들은 내 곁을 떠났어. 허망하고 또 허망했지.

남에게 소외되거나 차별받지 않으려고 성심껏 일을 했지만 혼자 사는 비영어권 동양인에게 친절한 사람보다는 모함과 소외감으로 얼룩진 내 삶이 참 남루하고 부끄러웠어. 하지만 내 마음 속으로는 6.25 참전 여군 장교로 격동의 한국사에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았다는 자긍심을 놓치지 않았어.

이제 돌아 갈 차비를 갖추려고. 어릴 적 색동옷 지어주시던 어머니의 곱던 얼굴과 아버지의 인자한 모습이 노을처럼 번지던 곳으로 돌아갈거야. 내 부모형제 둘러 앉아 만두 빚고 깨알 웃음 쏟던 내 고향 평남으로.”

스잔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인자하고 곱기만 하던 첫 인상과는 다른 강인함과 따스함이 느껴졌다. 스잔은 마음의 응어리를 서슴없이풀어내고 풋처녀처럼 발그스름한 모습으로 내게 더 가깝게 다가왔다. 한국전의 여군 장교로, 파독 간호사로, 두 아이를 지키기 위한 어머니로서의 삶에 어디 한점 남루한 구석이 있다는 걸가? 부끄러움은 우리가 견디고 살아 온 흠집이 아니라 아픔의 결정인 것을 스잔을 통해 본다. 눈물이 솟구침은 아픔의 결정이 소금을 통해 정화되는 시간이리라. 내 살아 온 시간들을 돌이켜 본다. 부끄러움을 자랑스럽게 여기리라. 스잔이 준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므로. 스잔은 한국전 참전과 파독간호사로 한국의 근 현대사의 아픔을 한 몸에 이고 살아 온 구순의 독거노인이다. 이 년 전 거동이 불편해 양로원으로 옮기며 멀리 이국 땅에서의 곤한 삶을 내릴 곳으로 모국의 호국원을 택했다.

양노원으로 이사하던 날, 구순의 스잔에게 나는 그의벽에 새겨진 이름이다. 그녀가 떠날 채비로 남긴 우리나라 첫 여군이자 장교였던 한 분의 생애가 벽면에채울 이름 한 사람뿐이다.

아직 꽃빛 고운 날, 모녀처럼 ‘고향하늘’을 부르며 나란히 걷고 싶다. 통일의 무궁화 동산에 닿고 싶다.

푸른 산 저 너머로 멀리보이는 새파란 고향하늘 그리운 하늘

정다운 동무들과 시내 가에서 버들피리 불며 놀았습니다.
<고향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