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구 계성중학을 다녔다. 집이 있는 남문시장 부근에서 학교를 가다 보면 90계단이 나왔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높아 보였는지, 그 끝이 하늘에 닿을 듯 했다. 아니 하늘 대신에 하늘나라를 만날 수 있는 예배당(대구제일교회)이 계단 끝에 있었다. 계단 오르기가 지루하면 동무들과 가위바위보를 했다. 그때도 나는 항상 지는 편이어서 올라감이 더뎠다. 그러다 등교시간이 가까워지면 친구들은 이겨도 올라가지 않고 내가 따라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함께 손잡고 노래 부르며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아랫길로 내려 갔다.
순진무구했던 소년 시절. 뺨 발그레하던 친구들도 세월의 모진 바람 속에서 시들고 여위어간다. 종래는 모두 자취도 없이 사라지겠지. 대구 90계단에서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찾아 볼 수 없듯이, 세인트 토마스 99계단에서도 아내와 나의 흔적은 사라지리라. 다만 추억 속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뿐.
‘검은 수염’을 찾아가려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온다. 퍼붓지는 않지만 금방 옷을 적신다. 바람도 덤으로 따른다. 주변을 살피니 대문에 처마가 있는 집이 보인다. 40대초반으로 보이는 암갈색 얼굴의 남자가 흰 이를 드러내며 대문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 아내와 함께 뛰어드니 공간을 내어준다. 무더운 날씨지만 가끔씩 하루에도 몇 번 스콜(열대 소나기)이 온단다. 바람도 함께 불어주니 시원해서 좋단다. 캐나다에서 살지만 한국사람이라고 하니 두 팔을 교차하면서 ‘말 춤’흉내를 낸다. 그리고 한국은 부자나라라면서 부러워한다. 어떻게 아느냐니까 세인트 토마스 섬 토박이지만 경기도 안산 어느 공장에서 1년을 일했단다. 어땠냐고 조심스레 물어본다. 사장님이 좋은 분이라서 잘 지냈다고 한다. 못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갑질’이 다반사인 한국사람을 생각했다가 비로서 한숨 놓는다. 적어도 그는 한국사람들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비가 그치고 바람도 잦아들었다. 작열하는 태양에 젖은 옷도 금새 마른다. 아내와 나는 제법 경사가 있는 거번먼트 언덕길(Government Hill)을 오른다. 그 끝에 ‘검은 수염’이 있다.
여행 출발 전 ‘검은 수염’에 대한 동영상을 유투브에서 봤다. 듣고, 보고, 즐길 거리가 많을 것 같았다. 성 안에 있는 감시탑에서 보면 세인트 토마스 섬 전경을 볼 수 있다. 수영장도 있고, 해적박물관(Pirate Gallery)도 있고, 130여종의 럼 술을 맛볼 수 있는 바도 있다. 월계수군락과, 향수재료를 추출했던 플루메리아꽃 정원이 있는 1860년대에 건축된 빌라 노트맨(Villa Nortman), 손으로 만든 마호가니 테이블, 19세기풍 거대한 샹들리에, 장식용 손도끼, 예술적으로 조각된 책상과 의자 등이 거실에 들어선 하겐슨 하우스(Haagenson House)등 유서 깊은 건물들도 있다. 검은 수염 해적의 실제 모델인 캡틴 에드워드 동상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기대는 막상 출입구 앞에서 물거품이 되었다. 태풍 이르마로 내부가 손상되어 문을 닫았다. 금년 1월에 거기 다녀갔는데 1년이 다 되어가는 11월에도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세인트 토마스 섬이 속해있는 미국령 버진 아일랜드는 미국의 주가 아니기 때문에 연방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을 수 없고, 관광산업으로 먹고 사는 이 미국 자치령은 예산이 없어 쉬 복구를 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굳게 문 닫힌 매표소 뒤로 미안한 듯 타워가 얼굴을 살짝 내밀고 있다.

힘들게 99계단을 올라 왔는데 별 소득이 없어 허탈했다. 그러나 내려오는 길에 성 뒤편으로 작은 인공 못 안의 세 여자 동상을 보았다. 무언가 살펴보니 안내판에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1878년 세인트 크로이드섬(세인트 토마스 섬 인근)에서 노예출신의 세 여자가 근로조건 개선과 삶의 질 향상을 요구하며 덴마크 정부에 저항하는 폭동에 앞장섰다. 항거 중 프레드릭스테드시가  화재에 휩싸였다. 이 항쟁은 오늘날 ‘대화재(Fireburn)’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주도한 여인들의 이름은 퀸 메리, 퀸 아그네스, 퀸 마틸다로 다시 명명되었다.’
그녀들의 본명은 메리 토마스, 엑슬린 엘리자벳, 마틸다 맥빈. 모두 흑인여성들이었다. 덴마크 서인도회사가 사탕수수농장을 운영하면서 200년동안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고 온 노예들의 후손이었다.
1848년 노예해방령이 공포되었는데도 여전히 회사는 자유노예들을 고용하면서 종신노예처럼 혹사했다.
자유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면서 첫 시위는 평화로웠다. 그러나 군인들이 동족들을 살해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평화롭던 시위는 순식간에 폭동으로 변했다.
시위대는 군인들을 향해 돌을 던졌고, 군인들은 시위대에 발포했다. 군 요새 습격에 실패한 시위대는 사탕수수농장과 덴마크 회사직원들의 가정집과 상점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거세게 타올라 시의 절반을 태웠다. 세 여인은 ‘자유를 위해 피를 흘리자. 아니면 불 속에서 타 죽자’면서 스스로 횃불을 들고 도시 방화에 앞장섰다. 그때가 1878년, 노예해방 선포 후 30년 뒤였다.
군대의 진압을 시위대가 당할 수 없었다. 400여명이 체포되었고, 세 여인을 포함한 39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시위의 요인이 회사의 열악한 노동환경 조성임을 안 덴마크는 세 여인을 제외한 대부분에게 단기징역의 감형을 내렸다. 세 여인은 폭동주도 및 방화범이라는 죄목으로 덴마크에서 감옥생활을 하다가 종신형으로 감형, 고향인 크로이드의 감옥에서 일생을 마쳤다. 사람들은 그녀들의 이름 앞에 ‘여왕’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이를 기려 동상을 세웠다.
순결한 우르슬라 공주가 야만인 아틸라에게 항거도 못하고 순교하여 이름 지어진 처녀 섬. 세월이 흘러 야만적 처우를 하던 회사에 목숨을 걸고 항거하던 세 여인들. 순결을 지키기 위해, 인권을 찾기 위해 자신의 행복을 희생한 여인들.
문득 생각나는 북녘 동포들. 언제나 압제의 그늘에서 벗어 나려나. 나눠진 섬, 그 섬들 사이에서 오늘도 푸른 하늘 가르며 무심히 흐르는 캐리비안의 뭉게구름처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그 처녀, 그 여인들의 숭고하고 용감한 정신 영원히 흐르리라. 정박항 뱃고동 소리가 나그네의 길을 재촉한다. 나는 또다시 미지의 항해를 준비한다.

문인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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