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_나의 교육경험 이야기 <글·사진 전재민 (수필가) >
 
이제는 잊혀져 간 우리네의 아름다운 풍속 중에 하나였던 첫 취직해서 월급을 타면 부모님께 선물하는 빨간내복. 빨간내복은 아니지만 다른 옷을 사다 드린 기억은 남아 있다.  빨간내복을 받고 대견하고 기뻐했을 많은 부모님들 그런 맛에 자식을 낳고 기르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나의 부모세대 즉 일제시대에 태어나 일제치하에서 살고 해방 후에도 격동의 세월을 보낸 세대. 일본 징용과 한국 전쟁을 몸소 체험한 세대 그 분들은 지금 대부분 돌아가셨다.  난 6.25이후에 태어난 전후세대라서 전쟁이나 어려운 걸 잘 모른다.  하지만 지금 세대에 비하면 또 격동의 시대에 살지 않았나 생각이 된다.
박정희 독재정권에서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하면 집에 가지 못하고 우유컵을 가방에 달고 학교가서 분유 끓인 것을 받아마시고 방학숙제로 퇴비를 해가야했던 시골초등학교시절과 까까머리에 검정교복을 입고 일제시대 학생들처럼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세대, 교련시간에 총검술훈련과 열병과 분열제식훈련을 하던 세대, 그러니 지금 세대와 비교하면 또 구세대 일수도 있다.  초등학교때 집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 아래서 숙제하던 아이, 빤스도 못 입고 홋겹의 바지를 입고 그 추운 겨울에 학교가 다 배가 아파 어쩔 줄 모르던 아이가 추억의 그 곳에서 있다.  대학을 가기 위해 몰래 시험보고 발표가 났지만 대학을 가면 농약을 마시고 죽겠다는 아버지가 밥상머리에서 마주하는것 조차 싫어 무작정집을 나가고 싶어서 가게된 직업훈련원은 당시에 군훈련 못지 않았다.  입학식 단상위에서 서 교사의 얼굴을 날리던 원장은 지금도 그 이름을 잊지 못한다.  일종의트라우마다. 총화은행장학금을 받아 식대를 내고도 남아서 집에 조카의 세발자전거를 사 가지고 오던 또 다른 내가 그 시절 그 세대에 서 있다.
나중에 결혼전까지도 직장을 다니고 대학을 다니느라 부모님께 경제적으로 보태드리지 못하고 결혼 후엔 맨발로 서울하늘에서 도와 드리지 못하고 아이들이 아파서 아내가 입원해서 이런저런 이유로 생활비도 드리지도 못하고 이민을 훌쩍 떠났다. 
이민와서도 늘 어머니, 아버지께 한번 다녀가시라고 했지만  아들이 사는 천당 아래 제일 좋은 곳이라는  999당을 한번도 다녀가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는 비지니스때문에라는 이유로 장례식에도 가지 못했다. 돌아보면 잘한거 하나 없는 후회가 많은 부모님과의 관계이다.  하지만 군대가기 전 날까지 배추 팔러 어머니와 리어커를 끌고 4키로 편도길을 3번이나 왔다 갔다 한 적도 있고 충주 땜 석축 쌓는 일에 보조일을 하면서 받은 돈을 고스란히 어머니께 가져다 드렸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결론은 부모님은 부모님 형편에서 열심히 하느라했다고 생각하고 나도 아들로써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좀 더 잘해드릴 수 있었다면 아버지 바람대로 면서기를 하면서 시골에서 모시고 살았다면 더 좋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역마살도 병이라고 이민병이 들어 이민한 걸 후회하진 않는다.
 
나에게도 쌍둥이 남매가 있다. 지금 이십대 중반이고 대학을 졸업하고 괜찮은데 취직을 해서 안정된 생활을 할 나이지만 그렇지 못하다 . 그래서 내가 어렸을 때는 혼자 벌어 대학을 다니고 했다고 나의 과거를 얘기하려고 하면 아내가 막는다.
사실 부모는 자녀들이 잘 사는 걸 보는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낀다.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는 거래같은 관계가 아니란 얘기다. 하지만 무작정 퍼주기만 하는 사랑도 진정한 사랑일 수 없다. 홀로서기를 할 수 없게 막을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자녀들이 독립해서 나가기를 바라지만 안 나가고 집에서 버티는 자녀들을 나가게 하는게 쉬운일은 아니다. 그래서 많은 동양부모들이 자녀들을 끌어안고 가는 기간이 길어지는 것은 아닌지하는 생각도 든다.  동물들도 때가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자기영역을 확보하고 생활한다. 부모가 보호하면 보호할수록 자녀의 독립엔 오히려 치명적일수도있다. 가진게많다면 자녀들에게 나누어 주고 집도 사 주고 안정된 생활을 할수있도록 하면 좋겠지만 다 그런것은 아니니까…  캐나다에서 이민생활하면서 돈을 모른다는건 기적과도 같은 것이다.
얼마전에 차가 갑자기 시동이 안되서 CAA를 불러 토잉을 하면서 기사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 기사는 아내와 어린아이가 있다고 한다.  아내는 일을 했었는데 데이케어 비용이 많이 들어 일을 쉬고 아이를 보라고 했다고해서 아이가 어릴땐 엄마가 가능하면 아이를 키우는게 맞는것이라고 거들었다.  그리고 기사의 20살때 부모가 이혼하게되어 목요일에 아버지가 말하길 토요일까지 나갈 곳을 찾으라는 통보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아직 이틀이나 남았다고 하면서.
우리 아이들이 아직 집에 함께 있다고 하니까 그럼 아이들한테 기한을 정해주고 대학을 졸업할때까진 아르바이트를 해서 본인의 쓸 돈을 마련하게 하고 대학졸업후에도 집에 있게되면 나가기전까지 렌트비와 밥값을 내라고 하라고 만약 취직을 못해서 집에 있게되면 모든 문화생활을 끊고 잠만 재워주겠다고 말하라고 내게 말했다. 
요즘은 아이들이 게임을 밤낮없이 하는 젊은이들이 많다고하니 내가 해 줄 수 있는건 잠만 재워줄 수 있는데 언제까지다라고 못을 박고 그때가 되면 나가라고해야 독립 할 수 있다고 계속 봐주면 끝이 없다고 말한다.
사실 요즘은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졸업해도 취직을 못하고 안하고 하는 젊은친구들이 많고 이들을 가리켜 캥거루족이라고 한다.  캥거루가 새끼를 배에 있는 아기주머니에 넣고 다니듯 젊은이들을 보호하여 독립하지 못하는 걸 가르킨다.  설령 독립해서 아주 탄탄한 직장이나 직업을 가지고 고소득 연봉을 받아도 부모들을 몰라라하는 경우도 많이 본다.
부모들이 은퇴하지 못하고 칠순이 넘어서도 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연방정부공무원이라 은퇴연금자를 부르기도 하지만 연금도 천차만별이고 연금으로 고액의 렌트비가 형성된 밴쿠버에서 살기가 쉽지는 않다. 
우리가 힘들게 살면서 부모님들을 돌보지 못했던 것보다  앞으로 더 힘든 삶을 살아가는게 아닐런지. 그래도 내리사랑이라고 부모는 늘 손주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쓸 정도로 주어도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이다. 
사회든 국가든 가족이든 누구한 구성만의 희생이 강요되어선 안 된다. 함께 일하고 함께 짐을 나누어질 줄도 알고 함께하는 사회나 가족이 되기위해서는 서로를 챙기는 것이 진실한 사랑이 아닐까? 진정한 가족의사랑과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빨간내복에 담긴 사랑을 다시 한번 되세겨본다.
facebook_밴쿠버 교육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