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는 마음에 흥분을 주지만, 녹차는 마음을 정화시켜 준다.
녹차 한 잔을 앞에 놓는다는 것은 고요와 대면하는 일이다. 우리 차 문화의 전통과 맥락이 사찰을 중심으로 계승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사찰은 깊은 산중에 있다. 고요, 침묵, 명상의 시. 공간에 자리 잡고 있다. 천년 사찰이면 고요도 더 깊을 것이며,건물 단청이 퇴색되고 기와지붕 위 풀꽃이 피어있는 곳이면 고요도 더 향기로울 것이다.
고요는 녹차 맛이 난다. 마음이 맑아지고 착해진다. 귀가 밝아져 솔바람이 심하여 혼자 내보는 풍경 소리도 잘 들린다. 눈이 밝아진다. 산 능선과 산 빛이 선명하게 다가오고, 하늘의 뭉게구름과 인사를 나누게 한다. 마음의 여유는 고요 속에서 생긴다.
절로 미소가 떠오르는 건 고요의 은덕이 아닐까. 고요와 더불어 차 한 잔을 마시는 순간의 행복을 누가 알겠는가. 고요는 어떤 상태나 분위기 라기보다도 손님처럼 느껴진다. 대화의 상대랄까 형체가 없을 뿐 얼굴을 맞대고 있음이 좋다.
중앙박물관에서 달빛 항아리를 보고 무한 고요를 느낀 적이 있다. 도공(陶工)은 평생을 바쳐 항아리에다 달빛 고요를 담아놓았다. 우주 공간 속에 떠오른 보름달 그대로이다. 광택이 나 눈부시지 않게 은근한 그리움을 펼쳐내고 있다.
말 한 마디 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통하는 눈짓의 말을 하고 있다. 고요가 깊어져 오묘했다. 화조(花鳥) 혹은 사군자(四君子) 같은 그림으로 장식할 이유도 없다.
항아리 그 자체로서 달이 되고 우주의 신비를 지니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기는커녕 마음이 맑고 향기로워 지는 달빛 항아리를 만들어 내려면, 도공의 마음엔 얼마나 고요가 쌓여 깊어져야만 할까.
마음에 집착, 이기라는 때와 성냄, 시기라는 얼룩과 어리석음이란 먼지를 씻어내고 스스로 달빛 고요의 경지가 된 것일까.
장자가 어느 날 이상한 까치가 날아서 밤나무 숲으로 가는 것을 보고, 활로 그 까치를 잡으러 급히 따라갔다. 그런데 가서 보니, 까치는 장자가 자기를 잡으려고 하는 줄 모르고, 숲 속의 버마재비를 잡으려 급히 날아간 것이었다. 버마재비는 까치가 자기를 잡으려고 하는 줄 모르고, 나무 그늘의 매미를 잡으려고 집중하여 자신을 잊고 있었다.
장자는 이를 보고 놀란다.
‘모든 것이 <이(利)>와 <해(害)> 두 종류를 서로 부르고 있으니, 욕심이라는 것이 두렵다.’ 하면서 활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때 숲의 밤나무를 지키던 사내는, 장자를 밤을 따러 온 도둑인 줄 잘못 알고 따라오며 욕을 했다. 집에 돌아온 장자는 자기도 까치를 잡으려는 욕심에 집착하여 밤나무 지기 사내가 좇아오는 것도 몰랐음을 뉘우쳐, 3개월간 뜰에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도공의 마음이 달빛 고요가 되지 않고선 어떻게 달빛 항아리를 만들 수 있으랴. 명품 도자기는 도공의 솜씨만으로 될 수가 없는 일이다. 기후와 불과 하늘의 기운이 한데 합해져야만 이룰 수 있다. 달빛 항아리를 보면 녹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 그냥 지나갈 수 없게 마음의 손길이 끌어당기는 듯하다.
그것을 무엇이라 해야 좋을까. 마음의 눈짓일까, 오래 동안 한 번 보기를 서로 기다려온 인연 같은 느낌이 든다. 눈빛만으로 인사하고는 그냥 지날 수 없다.
마음의 대화를 하기 위해선 녹차 한 잔이 있었으면 싶다.
고요는 은근하고 신비롭다.
우주로 통하는 문의 빗장을 열어준다.무한 공간을 운행하는 별들, 그 별 하나와 눈을 맞출 때,푸른 별빛은 내 동공 안으로 흘러온다. 아, 이 별빛은 나를 만나기 위해 몇만 광년 전에 떠나, 우주 공간을 거쳐 비로소 내 눈동자로 들어온 것이다.
나 또한 이 순간에 별빛과 만나기 위해 오랜 옛날에 태어난 것이다. 이 세상에 기적이 아닌 만남은 없다.
고요는 마음을 정화시켜 준다. 마치 정화수와 같다.
마음에 고요가 쌓여야만 근심이 사라지고 영원의 하늘이 보인다. 고요도 소리 없는 노래가 아닐까. 자신의 영혼을 비춰볼 수 있는 마음의 거울일 듯싶다.
마음에 고요가 깊을수록 평온하고 표정이 부드러워 진다.
고요엔 몰두의 불길이 있다.
굴 하나를 파고 들어앉아 스스로 하나의 질문에 해답을 얻고 싶어 한다. 고요의 문을 지나지 않고선 깨달음의 문 앞에 설 수가 없다. 고요는 흩어진 삶의 실마리를 찾아내게 한다. 집중으로 바늘귀에 실을 꿰맬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한다.
가을 하늘처럼 깊고 텅 비어 있어서 허공에 귀를 대면 영원에서 종소리가 들려올 듯한 고요-.여름 날 계곡 곁, 수백 년이 된 정자(亭子) 위에서 매미 소리와 만나는 한낮의 고요-.보름 날 밤, 수평선에서 밀려오는 은파를 바라보며 맞는 달빛 고요-.
하루를 여는 묵상 속에 서기를 띠며 밝아오는 새벽 고요-.
고요의 한 복판에 녹차 한 잔을 놓을 줄 아는 삶의 여유와 멋이 있었으면 한다. 자신의 삶 속에 고요를 오래 동안 끌어들일 수 있다면, 고요의 순간에 오래 잠길 수 있다면 무엇을 바랄 것인가. 차는 고요를 부르고, 고요는 차를 만나고 싶어 한다. 둘은 한 숨결을 지녔는가 보다.
고요는 영원의 모습을 지녔다. 자신과의 만남을 이루게 한다.
고요 속에 침잠해 들면 모든 것들이 질서 정연하다는 것을 느낀다.
고요는 깨달음의 길목으로 가는 안내자임을 알게 한다.
모든 것들이 흐르고 있다. 운명인가 하면 이치이고 신비일 뿐이다.
고요 속에 영원의 숨결이 흐르고 있다.
고요와 더불어 차를 마실 수 있는 벗이 있다면, 정갈한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글쓴이 | 정목일
1975년 「월간문학」수필 당선, 1976년 「현대문학」수필 천료
경남신문 편집국장,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연세대학미래교육원 수필 지도교수.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고문(수필부문). 한국문학상, 조경희문학상, 원종린문학상, 흑구문학상, 신곡문학상. 남촌수필문학상 등 수상. 「만나면서 떠나면서」(현대문학사), 「모래알 이야기」(자유문학사), 「달빛고요」(범조사), 「별보며 쓰는 편지」(고려원), 「깨어있는 者만이 숲을 볼 수 있다」(문학세계사), 「마음꽃 피우기」(청조사), 「마음 고요」(청어), 「모래밭에 쓴 수필」(문학수첩), 「햇살 한 줌 향기 한 줌」(문학수첩), 등 20여권의 수필집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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