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을 통해
밴쿠버에는 등산 할 수 있는 산들이 여러 곳이 있다. 그러나 나는 (Grouse Mountain 에2.9 kilometers 가 되는 가파른 G.G HikingTrailcourse를 좋아한다. 집에서 출발하여 코스를 끝내고 집에 돌아올때까지 짧은 시간 약 4,5,시간 내에 여러가지를 경험 할 수 있으며 힘들고 지루함도 잠깐 1시간 때로는 2시간동안 올라간다.
세계 각처에서 찾아 온 관광객들과 함께 천국이라고 불리는 밴쿠버에서 명산을 오르는 즐거움을 맛보며 등산할 때에는 모든 시름 다 잊고 마음 달래며 떠오르는 노래 구절이나 때론 찬송가를 부르고 때로는 그 주간에 어려웠던 문제들이 떠오를때면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기도 하며 주어진 오늘에 감사하는 마음가짐으로 산을 오른다. 오르다 보면 다른 나라에서 여행 중에 산행 나오는 분들이나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어떤 젊은 아빠는 3-4개월된 애기나 2,3살된 어린아이를 등에 지고 산을 오르는 가족들과 앞서거니 뒷서거니한다. 또한 서로 손을 마주 잡고가는 젊은 연인들 때로는 한국에서 여행오시는 분들이나 여기 현지 교포분들도 부담없이 만나며 가파른 산길을 삼삼오오 줄을 지어 올라가는 선한 무리들 아름답게 펼쳐 놓은 풍경을 쳐다보며 함께 산을 오를 때의 즐거운 나만의 시간들이 소중하고 귀하여 나 나름대로의 취향으로 만든 가사에 곡을 붙여가며 혼자서 때로는 타지에서 이 산을 미리 알고 특히 유럽에서 온 등산객들과 두 세명씩 쉬는 코너에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기도 한다. 때로는 나의 자작곡인(Grouse Mountain G,Ghiking trail course)을 노래한 “The Peak of heavenly Vancouver”을 부르면 그 다음부터는 첫 소절 부분은 금방 따라 부르면서 미니 콘서트를 흉내내며 서로 즐거워하는 시간들이 잠깐이지만 나에게는 큰 위안이 되어 다음 주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등산 할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있음에 감사하며 다음 산행이 기다려진다.

그라우스 마운틴 과 태극기
미세먼지보다도 더 탁한 공기가 자욱한 오토 바디 샵에서 일만 하다가 산행을 시작한지 여러 해가 지나면서 건강도 유지하는 것 같아 매주 한번씩 산을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Grouse Mountain Gust Service Roof에 여러나라 국기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태극기가 보이지않아 사무실에 물어보았더니 담당자가 휴가중이라 하고 때로는 주중에 오라하여 내가 속해있는 캠비로타리클럽 사회봉사 부장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면서 허락해주면 태극기를 기증할 터이니 지붕에 세워 줄 수 있겠느냐고 하였더니 흔쾌히 가져오라하여1999년 6월 27일경에 태극기를 전달하였으나 이 삼일이 지나도 태극기가 안 세워져 있어 섭섭하였었는데 7월1일CANADA Day휴일 아침에 산을 올라갈 때에도 보이지 않던 태극기가 곤도라를 타고 내려오며 오늘은 태극기가 세워져 있을까하고 국기들이 세워져 있는 지붕을 살펴보니 다른 여러나라 국기들 사이에 태극기가 세워져 있는데 유난히 태극기만 팔락이며 마치 나를 반기어 주는 것처럼 팔락이고 있었다. 왜 저 많은 다른나라 국기들은 모두 축 늘어져 있는데 우리 태극기만 유난히도 팔락이지 어떻게 저렇게 양팔을 내저으며 나를 반겨주고 있을까
또 내 빰에 흐르는 눈물의 이유는 무엇일까 ?
어렵고 바쁜 이민 생활하면서 이 곳에 와서 사는 다른 서구나라 사람들처럼 큰 집에서 한번 살아볼 때가 올거라고 앞만 보고 오면서 그 곳에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기에 이 날까지 달려온 영승이가 태극기 하나를 다른 나라 국기들 사이에 세워 두게했더니 “태극기가 한국사람인 나 영승이를 알아보는가?“
나 혼자만 내 가족만 생각하고 한국을 떠나온 부족한 것이 많은 이민자인 영승이에게 “나 여기 세워주어서 고맙다” 고 말하는 것처럼 반기워해 줄 줄이야.
나는 지금도 그때의 감격을 생각하며 때로는 설례는 마음으로 다른 나라 국기들과 나란히 서서 나부끼는 태국기 앞을 지날때면 종종 태극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행복한 습관이 생겼다.

자동차 기술교육과 이민
나의 젊은 시절 한국이 모든 분야에서 어려울 때 1966년 초에 군대에 입대하여 618 주 특기를 받고 진해 수송학교에서 자동차 기술교육을 받을 때 육군사관학교를 막 졸업한 교관님께서 훈계하신 말씀이 “혹자는 군대를 인생에 잠깐 쉬어가는 코너라고 하지만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사나이가 되는 출발점이라 생각하고 주어진 교육에 성실하게 임하여 3 등 안에 오른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부대에 배속 받을 수 있는 특혜를 받게 될 것이다.
머지않아 우리나라에도 My car 시대가 올것이다 라고 훈시해 주셔서 우리 모두는 열심히 노력하여 훈련과정을 모두 마치고 졸업할때 나는 다행히 등수안에 들어서 기술을 더 배울 수 있는 부산병기 차량창으로 배속되어 값진 경험을 하고1968년 9월14일 만기 제대를 하여 군대에서 배운 기술로 자격증도 하나,둘 ,취득해가며 직장을 얻어 결혼도 하고 딸 하나 아들 하나 우리 4식구가 함께 가정을 이루며 생활해 오던 중, 향토 예비군 훈련에도 참여하여 옛 군대 동료들을 만나 서로의 근황들을 나누며 장래의 살아갈 길을 의논하다가 현 직장에서 받는 월급으로는 아이들 교육이나 생활하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때마침 독일 광부 모집이니 사우디 아라비아 근로자 모집이 다하여 혹시 나에게도 그러한 기회가 올까하고 안국동 뒷골목 해외 직업 소개소를 찾아다니며 줄을 서서 기다리며 초조해하던 그 어려웠던 때에 우연히 처가쪽으로 친척되시는 분께서 캐나다에서 학위를 받고 성공하여 고국에 방문 오신 분을 소개받아 그 분에게 우리 같은 사람도 그런데 가서 살 수 있겠느냐고 말했더니 기술 면허 가진 사람은 이민하는데 점수를 따고 들어간다고 하시며 용기를 주어 나의 자격증과 이력서를 영문번역하여 공증받아 캐나다로 보낸지 3여년만에 ‘구하라 구할 것이요 찾으라 찾을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 라는하나님의말씀이 담긴 편지와 함께 밴쿠버 소재의 Musgrove Ford Sales ltd에서 채용해 주겠다는 고용계약서 를 보내와 홍콩에 있는 캐나다 대사관을 통해 승인을 받아 비자를 받고 바로 반공 소양교육을 받은 후 노스 웨스트 에어라인에 가 캐나다에서 보내온 고용계약서를 보이고 4식구 모두 월부 상환 외상 비행를 타고 일본을 경유하여 시애틀을 거처 밴쿠버 공항에 내려 앞줄을 따라가다보니 거의 모두 다 나가고 어느새 우리 가족만 남아있나 싶었는데 눈이 큰 백인 아가씨가 우리 주위를 뱅뱅돌며 ”앵앵”하고 다니면서 나에게 “와 디즈 유아 네임?” 아마 내 이름을 묻는가 싶어 영양(young yang) 하였더니 오른 손을 번쩍 들며 손짓으로 따라오라하여 여기저기 안내를 받아 밖에 나오니 친척들이마중나와 밴쿠버에 정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