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타고 있으면 풍경이 지나간다.
내가 차를 타고 가기 때문에 풍경이 지나간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 하나만 봐도 나는 내 중심으로 세상을 본다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풍경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어떻게 변하는지는 밖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겠지만 나는 풍경을 그렇게 서로 접하고 있는 곳에서 겨우 나의 위주로 만나고 있다. 모든 관계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만나는 공간은 의미가 있기도 하고 의미가 없기도 한다. 그 의미는 그 의미를 부여한 사람에 의해서 새롭게 개인적으로 소소하게 창조된다.
나는 그런 무수히 많은 의미를 가지고 살았고 때로는 좋기도 나쁘기도 한 어떤 의미를 무엇인가에, 누군가에게 부여하면서 살았다. 그것은 어떤 때는 그 사람에게 가서 의미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오로지 나의 갇힌 의미로 남아 있을 뿐이다. 누군가에게 가서 의미 있는 의미가 된다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고 그것이 나의 의미를 가치 있게 하는 오로지 나만의 의미에서 벗어나는 통로일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의미를 공유하기도 하고 같이 공유한 의미가 같은 의미의 의미라고 말하기 힘들 때에도 우리는 그것도 다 통틀어 의미라고 한다.
사진 찍기는 나의 취미다. 중학교 시절 응용미술을 조금 배우긴 했어도 그림은 그릴 줄 모른다. 그림그리기는 작품을 완성하는데도 그렇지만 배우는데도 많은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이다. 구성을 조금 해보긴 했어도 소묘(데생)를 배우지 못했고 워낙 쉬운 걸 좋아하는 게으른 성품이라 사진이 내게 더 잘 맞는다. 좋은 사진 작품을 프로처럼 찍으려면 공부도 많이 하고 노력도 많이 해야 하지만 가족사진을 찍는 정도의 나의 사진 실력으로도 프로처럼 부담 없이 즐기고 어쩌다 사고로 잘 찍힌 영문을 모르는 그런 사진을 만나는 시간을 더 좋아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무의식의 예술성이 나타난 게 아닌가 하고 확대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지금은 필름으로 사진을 찍던 시대는 지나가고 디지털화 되어있기 때문에 찍으면서도 어떻게 찍었는지 확인할 수 있어서 매우 유용하고 빠르고 경제적이다. 스마트 폰에 장착되어있는 카메라 기능은 매우 즐겁고 재미있다.
산수가 좋은 이곳 BC주에서는 어디서나 좋은 풍경사진을 찍을 수 있다. 요즘 같은 코로나시대에는 자의든 타의든 집에 갇혀서 사는 시간이 많고 답답할 때면 가까운 곳으로 산책을 가고 걷다가 기념이 될 만한 모든 것을 스마트폰에 사진기에 담는다. 경치보다 멋있는 사진도 있고 사진보다 멋있는 경치도 있다. 내가 찍은 사진을 놓고 내가 의미를 부여한다. 순전히 나의 판단으로, 나의 개성으로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을 판단한다. 코로나로 답답하기는 해도 사는 곳에서 가까운 곳을 다니면서 무료함을 해소하고 타성에서 벗어나려고 애쓴다. 어느 곳이든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내 마음에 차지 않아서 그렇지 먼 곳이라고 해서, 유명한 곳이라고 해서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먼 곳에서 내가 사는 곳을 오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은 걸 보면서 시장에서 유통되는 가치보다 원래의 가치를 생각해 보는 계기로 삼고 있다.
풍경은 지나간다. 풍경은 매우 빠르게 지나간다. 꼭 나의 인생 같다.
내가 사진으로 담고 싶은 풍경은 아니, 내가 이미 내 가슴 속에 담은 그 풍경은 사진으로 다시 담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사는 곳의 풍경이 매일 같아보여도 같은 풍경이 없는 걸 보면 나의 감동과 찍어놓은 사진의 표현은 영원히 같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풍경도 나의 마음도 빠르게 급하게 변한다. 내가 찍어놓은 사진은 나의 감동과 추억을 재생하는데 빌미나 단초를 제공하는 자료일 뿐이다.
좋은 사진, 좋은 풍경, 좋은 생명, 좋은 나는 얼른 지나간다. 서둘러서 얼른 찍어라 그리고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나는 좋은 사진, 좋은 풍경, 좋은 생명, 좋은 나를 만나기 위해서 서두르기도 하고 기다리기도 한다. 나는 내가 찍고 싶은 사진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내가 만나고 싶은 풍경을 찍고 싶어서 항상 기다린다. 찍어놓은 평범한 사진에서 의미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한 가지의 일이 두 가지 상충되는 행동과 해석으로 완벽하게 완성하는 일은 이렇듯 흔하다. 그것은 상충하는 두 가지의 일이 아니라 하나에 포함된 두 가지 필요한 조건이다. 우리는 이것을 모순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역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언제나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기다리며 살았다.
기다림은 매 순간 변하는 풍경처럼 언제나 내 앞에 서고 나에게 감동을 준다. 차를 타고 지나가거나 산책할 때, 창밖을 내다볼 때 나는 항상 풍경 속에서 풍경을 본다. 다 그게 그거 같지만 항상 다르다. 내가 모르거나 그냥 지나칠 때도 풍경은 변한다. 나도 변한다. 의미도 변한다. 그리고 거기서 받은 감동도 변한다. 오로지 변하지 않는 것은 이렇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 뿐일지도 모른다.
나는 풍경이다. 나는 풍경의 부분이다. 나에게 오면 꽉 찬 전부가 되는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