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성분 (현)캐나다 써리한국어학교 교장

 

승주가 클라라에게 듣다

학생들이 온다. 우리 한글학교로 온다. 승주와 지우, 나래와 준이는 오늘 토요일도 바쁘다. 주말이지만 노는 일 다 밀쳐두고, 어김없이 ‘토요한글학교’로 온다. 주중에 그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배우는 수업과는 다른 수업을 하기 때문이다. 오늘 토요일은 한국교과서로 한국 공부를 따로 하는 날이기에 더욱 분주하다. 무거운 가방만큼이나 얼굴도 힘들어 보인다. 이들 중에는 캐나다에 일정 기간만 살다 가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그 중에는 유학생들도 있고, 부모님 직장을 따라 이곳에 와서 살고 있는 학생들도 있다. 짧게는 1년 길게는 5년 정도 캐나다에 머물고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이다.
우리 한글학교에는 여러 부류의 학생들이 온다. 이민 와서 사는 가정의 자녀도 있고, 이곳에서 태어나 한국어를 잘 몰라서 배우러 오는 학생도 있다. 그런가 하면, 캐나다 현지인이 한류의 영향으로 한류를 즐기고자 한국어를 배우러 오는 학생도 있다. 학급 편성을 특별히 맞춤형으로 하여, 캐나다에서 몇 년 살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학생들만 모아서 가르치는 반도 있다.
이곳의 한글학교는 한국을 떠나온 사람들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익히게 하고, 한인 정체성을 일깨운다는 교육 목표를 가진다. 또 이곳 생활에 익숙해졌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사람들에게는 그 사이에 생긴 문화 격차를 좁혀 준다는 현실적 목표를 가지기도 한다. 그래서 한글학교의 수업은 한국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로 수업을 한다.
나를 비롯하여 몇몇의 선생님들은 한국에서 교사를 하다가 이곳에 와서 살기에 가르치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가끔은 우리 학생들과 힘든 대화가 이어지기도 한다. 학생들은 영어로 말을 하고 선생님은 한국말로 대답을 한다. 특별수업이 있는 날에는 귀국반(한국으로 돌아가는 반)과 문화반(캐나다 현지 외국인반)이 함께 수업을 하기도 한다. 한국 학생들은 영어를 배우고 싶어하고, 외국인 학생들은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하기에, 그렇게 합동 수업의 방식으로 공부하는 것이다.
자기 나라의 문화를 다른 나라의 학생들에게 서로 가르쳐 주는 활동 방식으로 수업을 설계하고 운영한다. 캐나다 학생은 한국인 학생에게 영어로, 한국인 학생은 캐나다 학생에게 한국어로 가르쳐 주는 것이다. 문화반 학생들은 캐나다의 짧은 역사 속에 가슴 아픈 원주민 이야기를 들려 주었고, 귀국반 학생들은 한국의 드라마, K-POP, 한국음식 이야기로 이어지며 한국을 알리기에 여념이 없다. 바로 그때 느닷없이 승주가 “ 아! 나는 한국으로 가기 싫어, 다시 여기로 오고 싶어” 하면서 울먹울먹 외쳐댔다.
승주는 한국에서 우등생이었다. 여기 캐나다로 유학온 학생 중에도 공부를 매우 잘하는 모범 학생이다. 그런데 돌아가기 싫다고 눈물을 머금으며 외친다. 무슨 개인적 사정이 절박한 것일까. 고국으로 향해야 할 승주의 마음에 어떤 그늘이 내린 것일까. 승주는 어떤 가슴 아픈 영화의 이야기를 클라라 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그 영화 이야기를 듣고 난 승주는 종종 친구들에게 말하곤 했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싫어.” 그런 승주의 생각이 오늘 수업 시간에 다시 터져 나온 것이었다. 클라라는 캐나다 현지 외국인 문화반 학생이다.

늪 속에서 말을 꺼내다
“조심해서 아래로 밧줄을 넣어요. 그리고 천천히 차를 뒤로 뒤로, 오케이 오케이!” 스산한 바람과 함께 겨울로 접어드는 하늘 배경으로, 누렇다 못해 다소 검은빛을 보이는 황야의 어떤 지점에 머리만 삐죽 내민 말 한 마리가 허우적대고 있고, 바쁜 사람들의 움직임과 외치는 소리가 TV화면을 가득 채웠다. 화면에는 이렇게 자막이 쓰여 있다.

<광야에 있는 작은 늪에 말 한 마리가 빠졌다. 뒷다리가 다친 것 같다. 위로 점프하지 못하고 나오지 못한 채 있다. 이웃 농장 사람들이 와서 꺼내주려고 하고 있다. – 캐나다 알버타주>

캐나다 알버타주는 위도가 높은 북쪽이라 겨울이 일찍 온다. 땅이 워낙 넓다 보니, 사람 사는 곳이 아득하게 드문드문 멀리 떨어져 있다. 사람의 자취 드문 거대한 자연의 영토이다. 록키 산맥을 지나고 나면 그냥 황량한 땅이 끝없이 이어지는 곳이다. 그런 어떤 지점에 야생말 한 마리를 구조하고자 트럭과 트랙트를 가지고 와서 안간 힘을 쓴다. 긴 장화를 신고 늪에 들어가서는, 며칠을 굶어서 배가 고파 죽어가고 있는 듯한 말을 구하려고 끙끙대는 모습을 텔레비전은 보여 준다.
그런데 내 눈에는 조금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 있다. 왜 빨리 꺼내지 못하나. 서둘러 대충 묶어서 말을 꺼내면 될텐데 말이다. 마치 애기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손길로 말 머리를 연신 쓰다듬으며, “괜찮아, 이제 곧 빠져 나오게 될거야.” 말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들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사람들의 정성스러운 도움으로 말은 이제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지, 늪에서 머리만 내놓은 채 먹이를 먹고 있었다. 주인 없는 야생 말 한 마리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몸은 진흙투성이가 되어가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으며, 찬바람 속에서 애쓰는 이곳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문득 내가 있는 이 곳에 대하여 새롭게 각성한다. 대자연의 섭리 속에서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의 따뜻함을 일상에서 실천하고 있는 캐나디언의 심성과 정신 문화를 내가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캐나다임을 다시 깨닫는다. 여기 오래 살아 오는 동안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 어딘가에 그런 정신의 동화가 일어났으리라.

클라라는 울었다
클라라와 내가 함께 본 영화는 <Drop Box> 였다. 클라라는 나에게 이 영화를 꼭 같이 보자고 했다. 그녀가 몇 주 전부터 인터넷으로 어렵게 구한 표라고 했다. 밴쿠버에서는 이 영화관에서만 상영한다고도 했고, 하루에 한번만 상영하기에 좌석이 매진이라고도 했다. 무슨 의미가 있는 아주 좋은 영화라고도 했고, 무엇보다 한국말이 나와서 공부도 된다고 하며 꼭 나하고 같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녀의 준비와 부탁이 감사했다. 나는 그녀가 영어와 한국말을 섞어가며 열심히 설명하는 것을 들으며,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 그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관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모두 백인들이었다. 내가 보기에 나와 같은 동양인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한국말도 나온다는데 왜 이렇게 모두가 캐네디언들 뿐일까 하고 잠시 생각을 하는 중에 어느새 영화는 시작이 되었다. 귀에 익은 한국말이 흘러나오면서 낯익은 서울의 모습들이 오버 랩 되더니 깨알 같은 영어자막이 깔렸다 사라졌다 하곤 했다. 그런데 영화의 내용이 내 마음을 아주 힘들게 했다. 한국에 있는 많은 미혼모들이 아기를 낳고는 육아를 감당하지 못해서 버리는데, 이 아기들을 데려다 키우는 어느 목사님 부부의 이야기였다.
추운 겨울에 갓 태어난 아기를 어린 미혼모들은 어찌할 줄 몰라 버리기도 하는데, 어린 생명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어느 노부부는 박스를 하나 만든다. 아기가 들어 갈 수 있는 작은 박스는 보온이 되도록 만들어 진다. 그리고 그 속에 아기를 넣으면 벨이 울리게 된다. 어느 순간이라도 벨이 울리면, 어떤 시간 어떤 날씨이라도 어김없이 노부부는 나가서 박스 속에 있는 갓난아기를 데려다 안으로 옮긴다. 자칫 추위에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아기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그런 장치를 가리켜 베이비박스, 이 영화에서는 ‘Drop Box’ 라고 했다. 영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미혼모들이 처한 안타까운 형편을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기들을 버릴 수밖에 없는 불쌍하고 안타까운 부모들의 이야기도 나오는 것이다.
화려한 서울의 겉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어둡고 칙칙한 뒷골목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빛과 어둠을 취재하고 알리는 그런 다큐멘타리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가슴은 먹먹했으며 슬프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내 나라의 아픈 현실에 눈물이 나다가도 불끈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갑자기 승주가 한말이 생각이 났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싫어!
외국에서 살다 보면 너도나도 애국자 안 되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나 또한 한국에서 교사를 했었고 또 캐나다에 와서는 재외동포2세 자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무슨 사명이라도 있는 것처럼 한글학교를 여러 개 설립하고 많은 시간과 내가 가진 재능을 몽땅 기부하며, 별로 알아주지도 않는 한글학교 일에 나의 삶을 다 바치며 지내왔다. 이제는 이곳 현지인들에게까지 한국말을 가르치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면서 살아왔다. 그들에게 한국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한국의 발전상을 알리며 열심히 봉사하며, 나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보이지 않는 외교관이 되어 애국자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났고 불이 켜졌다. 그런데 그 다음에 정말로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면 다들 주섬주섬, 주절주절 하며 일어나서 나가기 마련 아니던가. 잠시 침묵이 흘렀다. 5분여 지났을까. 어느 젊은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말을 한다.
“여러분, 서울에서 일어나는 저 슬픈 현실이 어찌 그곳 한곳이겠습니까? 불쌍한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우리 모두 잠시 기도합시다.”
영화관 안의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가족을 위하듯 저 슬픈 현실에 대해서 모두들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의 기도는 휴머니즘으로 눈물이 되어 뺨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클라라의 얼굴에도 두 줄기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서로가 선한 영향력을 주고받고
나는 애써 눈물을 감추고 싶었다. 슬프기도 했지만 가슴 한 편에는 분노 같은 것이 있었다.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픔과 분노가 내 마음 안에서 교차하였다. 내가 사랑하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부끄럽고 슬픈 일들이 저들의 기도와 눈물로 덮여지는 현실에 슬픔보다는 분노가 일었던 것이리라. 나는 내 나라에 대하여 당당하고 싶었는데, 마음이 아팠다.
우리말을 외국인들에게 가르칠 때도, 2세 동포들에게 가르칠 때도, 우리 문화와 역사가 그들의 가슴에서 살아 숨 쉬도록 하는, 그런 감동을 주려고 애를 쓰지 않았던가. 내 자존심이, 나의 조국에 대한 사랑이 막 그렇게 무너지는 것 같아서, 슬픔보다는 분노와 부끄러움이 범벅이 되어 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영화는 끝이 나고, 마음 불편한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그냥 헤어지기가 왠지 어색하기도 하고, 클라라에게서 뭔가 나와 토론을 하고 싶어 하는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나 또한 이대로 집에 가고 싶지가 않았기에 둘은 자연스럽게 가까운 카페로 향했다. 클라라가 더듬더듬 한국말로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선교사가 되어 한국에 가서, 저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 열심히 한국말과 문화, 그리고 한국의 역사까지도 배우고 있습니다.”
나는 또 한번 가슴이 먹먹함을 느꼈다. 처음 클라라가 우리 한글학교에 와서 한국말을 배우겠다고 왔을 때, 나는 약간 놀랐다. 클라라는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여성이다. 그녀는 한류 영향으로 캐나다 청소년들이 너도나도 한국말을 배우겠다고 수강신청을 하는 것과는 동기가 다르다. 그녀가 어린 아이들 틈에서라도 한국말을 배우겠다고 하지 않는가. 그녀의 한국어 학습 동기는 어디에 있는가.
클라라의 배움을 향한 열정은 실로 대단했다. 한번도 빠짐이 없었다. 억지로라도 과제를 달라고 하여, 집에서도 공부하고, 휴대폰에 녹음하여 가서 듣고 참으로 열심이다. 한국어를 배우면서, 한국 드라마를 보고,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노래를 외워서, 흥얼거리고, 쉴 새 없이 한국어에 매달린다. 그녀의 공부하는 모습은 한글학교 학생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그녀의 한국어 학습 자세는 귀감이 되고도 남았다..
대부분의 한글학교는 거의가 주말학교로 이루어지고 있다. 학생들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현지학교에서 생활하다 주말이면 놀고도 싶고 쉬고도 싶은데 한글학교에 온다. 재외동포 자녀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끌려오다시피 한글학교에 오는 학생이 대부분인지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런 어린 학생들과도 눈높이를 함께 하며 어우러져서 뒹굴며 배우는 그녀의 학습태도는 학기말에 우등상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그렇게 한국말을 배운지 1년이 조금 지나면서 클라라는 ‘나의 꿈 말하기 대회’에 나가서 장려상을 받았다. “나는 열심히 한국말을 배우고 익혀서 한국에 가고 싶습니다.” 라고 또박또박 자기의 꿈을 말해서 크게 박수를 받기도 한 클라라는 나의 자랑스러운 제자이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초등학교 교사를 했었다. 학생들에게 꿈을 갖게 하고, 미래를 개척하는 일에 열정을 쏟았었다. 그런데 이 먼 나라 캐나다에 와서 나는 그때보다 더 열정을 쏟으며 살고 있는 것 같다. 한국에서처럼 보수도 없는데 말이다. 가족들은 내게 말한다. 이제 내 아이들은 다 성장하였으니 쉬어도 좋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캐나다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 해도 나는 스스로 외교관도 되고 애국지사도 된다. 무엇보다도 외국에 나와서 살고 있는 우리 자녀들이 우리말과 우리의 문화와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잊지 않게 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나는 뿌리교육을 철저히 시킬 한국어학교의 교사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진다. 피한방울 섞이지 않는 캐네디언들도 우리나라를 위해서, 우리의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서 기도를 해주지 않던가!
비록 아픔을 보여준 영화 <Drop Box> 속의 생명이야기에도, 어느 노목사님 부부가 보여준 따뜻함이 있기에 대한민국은 오늘도 세계 속에서 당당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나 또한 작은 밀알이라도 되고 싶은 맘으로 나라사랑을 이렇듯 외치고 있지 않는가!
승주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열흘 전쯤 나는 승주와 만나서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승주에게 선생님도 그 영화를 보았다고 말했다. 승주가 내게 말했다.
“저는 한국으로 돌아가면 <Drop Box> 영화의 아픔을 줄이는 일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고 싶어요, 이곳에서 배운 사랑을 클라라와 함께 나누고 싶어요”
이렇게 말해주는 승주를 나는 따뜻한 마음으로 꼭 안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