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에 내 반쪽 알아 보고/밤 잠 설칠 때처럼//눈도 못 뜨고 오물거리던/신생아 실 아들 볼 때처럼//뉴욕의 모마(MOMA)[i]에서/살바도르 달리[ii]를 만날 때처럼//밴쿠버 공항에 처음 내려/무뚝뚝한 토템을 마주칠 때처럼//피천득 선생의 수필집/첫 장 내음처럼//

주페[iii]의 경기병이 되어/마상에 오를 때처럼//1월은 항상/새로운 한 걸음에/가슴 설렌다

 

해마다 되풀이되지만, 연말은 우울했고, 연초는 설렌다. 연말이 우울했던 것은 ‘속절없이 또 한 해가 지나가는 구나.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체 나이만 먹게 되겠구나’하는 생각 때문. 연초가 설레는 것은 ‘기왕 새해를 맞게 되니 이번에는 좀 더 잘 살아봐야겠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심도 있게 한국 상고사 공부를 하고, 경제경영관련 원서를 한 권쯤은 기필코 독파하고, 단편소설도 몇 편 써보고, 주류사회에서 다민족 시니어들과 좀 더 잘 어울리고, 손자녀석과 자주 놀아주고, 문인협회나 장년 회 회원들과 좀 더 유대감을 쌓고—보람 있을 것 같은 계획을 잔뜩 세워 보지만 작심삼일, 2월 들어서면 달려가는 세월 쫓기 바빠 제대로 이루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1월이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다짐이 스스로 미쁘다. 이 나이에도 ‘한 번 해보자, 까짓 것. 이판사판인데’하는 용기를 가지게 한다. 다 늙어 무슨 계획?하는 비관론자들도 있지만 8순에도 필자의 문학수업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고, 열심히 필기하며 ‘세계문명사강좌’를 듣는 사람들이 있다. 신(新)노인들. 나를 분발하게 한다.

1월의 느낌은 나의 시(詩) ‘1월’에 열거된 느낌과 같다. 처음 아내를 만나던 날. 이제 겨우 데이트 ‘1일차’에도 그녀와의 미래를 꿈꾸며 밤 잠 설쳤다. 강남성모병원 신생아실에서 눈도 뜨지 못하던 아들을 처음 대면했을 때 좋은 아버지로서의 결심에 가슴 벅찼다. 은행원 시절, 뉴욕 시티은행 본사에 연수 차 처음 해외로 갔었던 기억도 기억이지만 현대미술관에서 마주쳤던 살바도르 달리의 녹아 내리고 늘어진 시계그림 ‘기억의 지속’을 보았을 때의 그 예술적 충격. 가족과 함께 새로운 삶의 새 터전을 찾아 밴쿠버 공항에 내렸을 때 마주친 한국의 장승 같은 토템. 오랫동안 포기한 문학을 피천득 선생의 수필집 ‘인연’으로 하여 다시 시작했던 나날. 때로 삶이 우울하다고 느껴질 때 주페의 ‘경기병 서곡’을 듣고 나도 말 위에 올라 다시 질주해보고 싶었던 충동의 재현. 이러한 기억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 갔다. 1월처럼. 무언가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날들이 다시 내게 주어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갓난 아기로부터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에게까지. 허나 무덤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이세상에만 ‘생로병사’의 시공간이 존재하지 저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산 자들에게만 세월은 의미가 있다.

1월은 불편부당(不偏不黨). 어느 누구의 편도 되어줄 수 있지만 동시에 누구의 편도 되어주지 않는다. 세월의 경영은 사람에 달렸다. 선하고 착한 마음으로 1월을 경영하면 나머지 나날들도 그렇게 살 수 있다. 악하고 비뚤어진 마음으로 경영하면 남의 구설수에 오르고 배척당한다. 일신일신 우 일신(日新日新 又 日新)이 1월의 덕목이다. 오늘 하루 아름답게 살았다고 내일 하루 못되게 살지 말라는 뜻이다. 날마다 새롭게 마음을 갈고 닦아야 한다.

1월은 아직 한겨울이다. 눈보라 치고 비바람 부는 계절이다. 그 좋은 밴쿠버 햇살은 겨울에 참 인색하다. 1월에 밴쿠버로 이주한 세대는 우울한 첫 기억만 남는다. 다행이 나는 7월에 와서 누구에게나 좋은 첫인상을 이야기한다. 겨울을 견디는 것은 환상적인 여름의 기대 때문이었다. 그래서 인생의 겨울이 때로 슬프고 힘들지만 다가올 봄으로 행복하다. 떠나온 곳의 미세먼지와 좌우갈등의 소용돌이를 접하면 때로는 혼자만 ‘천당 바로 아래’까지 와서 미안하다. 선량하고 순수한 사람들을 벗하는 것도 덤이다. 때로는 흙탕물 일으키는 미꾸라지도 더러 있지만 어떠랴. 사는 ‘물’을 피하면 그만인 것을.

혹자는 이야기한다. 살아갈 날들이 살아온 날들에 비해 턱없는데 뭐 그리 새날이 좋으냐? 하면 대답한다.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남은 겨울보다 남은 봄을, 여름을 생각하며 산다고. 그리고 언젠가는 춘하추동이 없는 곳으로 가겠지만 내 있던 자리에는 계속 꽃이 피고 새가 날아들 것이다. 이 세상에서 누렸던 것은 저 세상으로 가져갈 수 없지 않는가? 따라오는 세대들은 먼저 가는 세대를 좆아 열심히 1월을 살아 간다. 그것으로 우리의 겨울은 족하다.

요즘 손자 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이제 겨우 한 살 넘긴 손자는 인생의 1월을 맞고 있다. 혼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주변의 보살핌이 없다면. 부모는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 손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녀석은 자기가 우리 가족 중 주인공이라는 것을 안다. 온갖 재롱은 녀석의 역할이다. 그러면서 성장한다. 먹이의 반은 흘리면서 숟가락 사용을 배우고, 뒤뚱거리면서 열심히 걸으려 한다. 꽃보고 웃지 않아도 어린아이의 미소보고 웃지 않는 사람 없다. 바깥에라도 나가면 마주치는 사람 모두 손자보고 환한 미소를 던진다. 내 인생의 겨울은 그래서 행복하다.

주변을 보자. 이제 갓 이민 온 세대. 첫 직장이나 처음 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 첫 공부, 첫 만남, 첫 신앙, 첫 여행, 첫 실패, 첫 이별—. 1월처럼 사람들의 첫 시작에 우리는 얼마나 관심을 보내는가. 내 일 아니니. 그저 무심 하느니 갓난 아이 돌보듯 관심과 사랑을 베푼다면 받는 이의 성장은 얼마나 빠를까? 그래서 1월은 온 누리가 첫사랑으로 가득하였으면 좋겠다. 새해 소원성취 하소서. 만사형통 하소서. 건강다복 하소서. 다정히 주고 받는 덕담으로 하여 또 한 해의 새 출발은 더욱 따뜻해 질 것이다.

[i] . MOMA는 Museum Of Modern Art(뉴욕현대미술관)의 준말

[ii] . 살바도르 달리(1904년 ~ 1989년), 스페인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

[iii] . 프란츠 폰 주페(1819년 ~ 1895년),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자 지휘자.

 

문인칼럼

facebook_밴쿠버 교육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