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사고로 숨진 고 김란희님 장례식에 다녀왔다.
이민자의 삶이란 ? 
나의기준으로 보자면 일가친척 하나없이 민들레 홀씨 마냥 비행기 타고 툭 떨어진 곳이 캐나다 밴쿠버다. 이민을 오기 전엔  비행기 한번 타보지 못한 시골 촌뜨기가 정말 아는 사람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없는  이역만리 머나먼 곳으로 떠나와 직장생활을 해도 직장생활 할 때 뿐 그것으로 자주 왕래하지  않는 그런 사이가 되고 한 군데서 오래 일하고 싶어도 타의에 의해 또 어느 땐 자의에 의해 떠돌아다니다 보니 운이 좋은것인지 몰라도 장례식 한번 가 볼 기회가 없었 던 것 같다.
종교는 불교라지만  일년에  손 꼽을 정도로 가는터다보니 다른 신자들과 안면쌓기 조차 힘들고
그렇게 외딴섬처럼  살아온  세월이 벌써  25년이 다 되어 간다. 한국에서 친척이나 지인이 상을 당해도 나가지 못하고 심지어 어머니가 돌아 가셨을 때 조차 나가지 못했다.
그러니 내게 장례식이란 어릴적  동네에서 치른 장례식과 할머니 장례식 그리고 아버지 장례식엔  사모제에 당도했다. 그래도  옛날 구식으로 상을 치르는 시골이라 삼베로 상복을 지어입고 아니 이미 지어놓고 기다린 걸  입었다는게 맞다 . 삼베로  만들어진 건을 쓰고 대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짚고 정말 잠도 못 자고  시도때도없이 곡을 해대야하는 방이 2개 밖에 없는 그 시골집에서 한 시간씩  쪽잠을 자면서 눈을 뜨면 곡을 해 대던 그 기억이 아주 깊이 남아있다.
할머니 상때는 재혼한 할머니가 초혼에 낳은 성이 다른 아들의 아들 따지고 보면 남인 그 사람을 할머니 장례지에서 만나 다른 사람이 상복을 입고 오면 안된다 난리치고 하던 그  어처구니 없는 해프닝도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려서부터  동네 상여 가 나가면  앞에서 선창을 하면서 요령을 흔드는 일을 하셨다. 꽃상여 위에서 서 망자를 위해 선창을 하던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선입견에서 보자면 오늘 장례식은  필리핀 동료의  결혼식에 참가했을때 보다 아주 많이 충격이었다.
사위가 사회를 보고 딸이 엄마가 좋아하던  유안진 시인의 시를 읊고 엄마를 그리워하고 사고 당시 현장에 함께 있다 유일하게 생존한 분의 사고경위 보고 그리고 대학선배의  추모사와 산우회 친구들의 추모사와 시낭독으로 이어지는 내내 장례식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정말 추모식같은 분위기 그리고 장지에 하관하는 것도 관위에 흙을 한 줌씩 뿌리고 직원들이  굴착기로  흙을 덮고 잔디를  깔고 향을 피우고 음식을 먹고 마시면서  고인에 대해 그리운 이야기들을 하다  각자의 집으로 갔다.
장지에서 내가 친구들에게 밴쿠버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주택난이 아주 심한것 같다고 했다.
우린 산행을 하면서 밴쿠버가 환희  내려다보이는 이 글 블루프에서 나 죽으면 화장해서 이곳에 뿌려 달라고 가족들한테 말하고 싶다고 늘 말한다. 산행하는 사람들 모두가 공감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죽어서도 산에서 밴쿠버의 산하를  굽어보면서 자연속에서  자연과 함께 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현실로 오면 그게 불법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한국에서는 수목장이라고해서 화장한 후 나무아래에도  묻고 강에도 뿌리고 하는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화장해서 조그만 사물함 같이 작은 유리상자안에  유골함을 모시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중에 종교생활을 열심히 안하고 뜸하면 나중에 사망하고 장례식이 문제가 있을 것 같다고해서 지금부터라도 종교생활을 열심히 해야하는거 아니냐고 말이다. 또한 어느 종교가 사후서비스가 가장 좋냐는 질문에 천주교가 가장 시스템적으로 잘 돼 있는 것 같다고 누가 그런다. 또 다른 분이 아니 원 불교가 가장 좋다는데 하는 말도 들린다.
이민자 대부분이 형제나 일가친척이 밴쿠버에 없는 경우가 많으니 다들 그런 걱정을 하는 것 같다. 
한국은 장례식장에서 다 해 주는 곳이  많지만, 가족이 없으면 초라한건 마찬가지일 듯싶다. 
종교생활도 직장생활도 이민자여서 겪는 고충도 많지만 이런 일이 있고 보니 정말 필요한 게 뭔지다시한번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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