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이야기)

 

지난날 나의 삶의 목마름과 갈등이 혼돈이고 벗어나는 것이 질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벗어날 혼돈도 없었고 질서라는 것도 딱히 뭐가 질서라고 말할 수 있는지 알 수는 없다. 그것은 마음이 편해지지 않으면 어떠한 일도 만족이 없다는 것과 걱정과 불안은 의식주만큼의 가치판단으로 우리의 삶의 식탁에 올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주 글에 깨달아야 한다고 글은 썼다. 숙제가 한가지 더 생겨 버렸다.
우리는 어렵고 힘든 어떤 특별한 곳에 진리가 있을거라 생각할 때가 있다.
불교경전에 “평상심이 도라고 했고 구약성경에 아람군의 장수 나아만에게 불치의 병이라고 여겼던 나병이 걸려서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찾아간다. 그 선지자는 만나주지도 않고 시종을 시켜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번 몸을 씻어라고 한다. 이에 나아만은 그 말을 듣고 싶지도 않고 이행할 맘은 더욱 없었다. 그때 부하들의 말이 이 깨달음을 체험하는데 좋은 방편이라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아주 하찮은 일 하나를 하는 일이다. “장군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 예언자는 장군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일곱번을 요르단강에 몸을 씻으러 가는 동안에 자신의 사회적인 지위의 힘, 지식, 정보, 통념의 힘을 빼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곧 자신이 그동안 믿고 있었던 어떤 힘 그것이 비록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다 하더라도 손들고 항복하라는 것이다. 나 역시 힘빼는 일이 되지 않았기에 혼돈의 시간이라고 살아왔던 것 같다. 혼돈이라고 이름 붙인 갈등은 대응하려 하면 오히려 저항, 증오, 부정적 감정이 커진다. 그래서 이것들은 우리의 의지로 해결하기위해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모든 어떤 행위들은 분별과의 싸움일 뿐이며 그로인한 강박관념으로 취함과 버림이 있는 마음노동만 가중될 뿐이며 비록 내가 취한 어떤 것도 시간 지나고 보면 아군이 아니고 버리려고 했던 것도 적군이 아님을 알게 될 때 허탈해진다.
그동안 나의 삶에서는 혼돈에서 질서로 자리매김 할 수 없었던 일은 어떤 일이었을까? 난 누구의 아내, 엄마, 며느리,딸이라는 관계로 맺어진 역할을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여질까 포장과 거짓에 동조해야 했고 내 인생이 아닌 남에게 어떻게 비춰질까하는 혼돈의 시간이 있었다.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잘 보이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좋은 사람으로 남아야한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인정받아할 곳이 있다면 이 법(깨달음)에 인정받는 일이고 이 법의 힘을 즉, 안목을 키워나가는 일이 있을 뿐 …예수님은 이 법(진리)를 목이 터져라 외치다 그렇게까지 하지않아도 잘 살 수 있다는 이론에 취중한 사람들에 의해 죽음의 길이 선택되었고 인도의 석가모니 역시 같이 수행하던 도반들조차도 인정해주지 않았던 그 체험을 49년동안 외쳤지만 마지막으로 제자 “가습”에게만 전해졌다는 것이다. 성경에 예수께서 “너희가 주님 주님 부른다고 모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또한 “믿음에 행동이 따라야 한다”고도 하셨다. 이 또한 이 깨달음에 관한 일이다. 여기서 주님! 부른다는 뜻은 내 의지로 밖에서 뭔가를 찾는 어떤 행위를 말함이며 믿음의 행동 또한 자선을 한다느니 착해져야 하는 그런 일이 아닌 그 앞서 이 깨달음을 체험하는 일이 먼저라는 것이며 이 체험을 하고 부터 진정한 삶의 안목이 넓혀진다. 그리하여 이것을 본성, 진면목이라고 할 수 있기에 사랑, 자선 이 체험하게 되면, 이들은 노력해서가 아니고 그냥 행동으로 나오게 된다. 지난날 혼돈속에서 질서를 찾아야 한다고 했던 그것이 혼돈이었음을 알게되고 ,혼돈은 벗어나야 하는 것이라고 방황하던 그 익숙함이 낯설게 느껴지고 있다. 폭포아래 곤히 잠든 아기새가 더이상 부럽지만도 않다. 현재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