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체험수기 수상작>
지난 몇 년간 전 세계 젊은이들의 아이콘은 단연 방탄소년단이었다. 그들이 신곡을 내놓으면 전 세계를 들었다 놨다 한다. 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칸, 아카데미 할 것 없이 전 세계의 영화상은 모두 휩쓰는 기염을 토해내었는데 나는 수상소감을 보는 것만으로도 짜릿하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케이팝(K-pop)과 케이드라마(Korean Dramas)로 상징되는 한국문화는 온 세계가 하나의 채널, 넷플릭스로 함께 즐기고 있다. 엄청나면서도 한동안 유행하다 말 것 같지 않게 한류의 바람은 실로 국경을 넘고 언어의 장벽을 가로질러 세계인의 일상생활 속으로 스며들어와 있다. 대한민국 땅을 떠나 캐나다라는 낯선 세계에 정착하면서 나는 이곳에서 이방인이었지만 지난 해 만큼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이윽고 나는 세계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한국어 교사 여정은 시작되었다.
우리 집의 네 아이를 기르면서 여러 곳의 한글학교를 거쳤지만, 아이들의 한국어 실력은 완전히 한글을 떼지 못했거나, 어눌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다. 한글학교를 등록할 때마다 다니기를 싫어하는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야 했다. 하지만 큰 아이는 십대가 되면서 K-POP를 좋아하는 캐나다인 친구들의 영향을 오히려 받아 역으로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나름대로 자기만의 한국어 사전을 만들고 있음을 발견했을 때 나는 속으로 환호를 외쳤다. 자기 방에서 조용하다 싶으면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있거나, 한국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나는 모르는 척 내버려 두었다. 어느 날 급기야는 웹툰의 한 장면을 가져와서 같이 읽어 보자 했다. 한동안 대화가 단절되었던 딸과의 대화를 이을 기회가 되었다. 지문을 읽어 내려가면서 한국 문화와 다른 캐나다 문화에 관해 토론했다. 그제야 억지로 한글학교에 보내고 자연히 한국인의 정체성을 갖게 되기를 바랐던 나의 안이함에 정신이 번쩍 났다. 한국어 학교 다니기 싫어하던 딸아이가 스스로 한국문화에 대한 흥미를 갖고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게 만든 한국 문화 콘텐츠 제작자와 창작자들에게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꿈이 선명해진 이상, 우리 집의 네 아이를 모두 다시 한국어 학교에 등록하고 나의 교사지원서 까지 첨부했다. 불현듯 국어 시간을 유난히 좋아했던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국어책을 소리 내 읽으면서 공부했던 시간, 열 문제의 한자 문제를 다 맞히고 싶어 더 많은 시간을 들여 국어 과목을 공부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했다. 캐나다에 이민을 오고 지난 십여 년 동안 띄엄띄엄 육아와 ESL 공부를 병행했는데 최근에서야 English 12를 끝냈다. 영어 수업이었지만 내게는 국어 수업처럼 흥미진진했다. 과제를 제출하기 위해 밤잠을 설치면서 고치고 또 고치는 탈고를 반복하면서 이 나이에도 배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나는 정말 국어를 제일 좋아했었다. 나의 마흔 다섯 인생, 생각해보면 힘든 나날을 견디어 내는 방법으로 일기를 쓰곤 했는데, 내 안에 남아있는 후회와 아픔을 글로 적어 내려갈 때 다시금 용기를 얻었음을 떠올렸다. 그랬다. 삶의 흔적들은 아픔도 주었고 상처도 남겼지만, 글은 남아서 나를 어루만져주었다.
올해는 온 인류가 코로나바이러스 전쟁 중이다. 사태가 악화하고 양상이 급속도로 번지는 가운데 두려움과 당황스러움을 우리는 모두 겪어내야 했다. 그리고 공교육이 멈춘 그 시간, 한글 교사들의 교사 회의가 온라인으로 시작되었다. 손 놓고 기다리지 말자. 우리 함께 극복해보자. 온라인으로 한국어 수업을 시도해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이었다. 내가 맡은 반은 만 세 살 반에서 여섯 살 나이의 제일 어린아이 반이었고, 부모 중 한 명이 한국인인 가정의 2세, 또는 부모가 현지에서 태어난 경우 3세의 아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한국어를 전혀 집에서도 사용하지 않거나 부모도 한국어를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첫 수업에서 “당신은 누구십니까?” 노래를 손인형을 사용해 불러보았다. 아이들에게 내 이름이 영어 이름 일지라도 한글로 모두 적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자신의 이름을 미술 작품으로 만들어보면서 한글이 얼마나 아름다운 글자인지를 알려주고 싶었다. 기역, 니은, 디귿, 리을을 깍두기공책에 적으면서 배워야 라는 힘든 한글 수업이 아니라서 그랬을까, 아이들은 자기의 이름을 보며 행복해했다. 어머나, 삐뚤빼뚤 글자가 이렇게 귀여울 줄이야.
숙제는 자연 속에서 내 이름을 찾아 만들어보는 것이었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아이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었고, 자신의 이름이 자연 속에서 한글로 만들어지는 장면을 보면서 한글을 사랑하는 마음도 싹트는 듯했다. 세종대왕이 말과 글이 어려워 사용하지 못하는 백성을 안쓰럽게 여긴 나머지 그 마음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것에 감히 비할 바는 못되지만 흰 종이에 연필로 쓰는 한글이 아니라, 돌과 꽃과 나뭇가지로 쓰는 한글의 아름다움을 우리 어린 친구들이 분명히 느꼈다고 믿는다. 이렇게 나의 첫 한글 수업은 어린 학생들과 한 번도 직접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로 인터넷을 통해 첫 만남을 맞이하였고 숙제 역시 사진으로 찍어서 온라인 교실 위에 공유하면서 공감대를 만들어내었다는 점에서 나는 장애물 건너뛰기를 한 달리기 선수처럼 느꼈다.
일주일에 한 번 한글학교에서만 한글을 배우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 집 아이들도 한글을 배우지 못했다. 그렇다면 평상시에 한글로 노는 방법은 무엇일까? 놀면서도 한글을 배울 방법은 있을까? 나는 고민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잠들었고 꿈에서도 고민하고 일어나면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름하여 “한글 저금통”이다. 집 안에 있는 빈 통으로, 예를 들면 다 먹은 아이스크림 통, 투명한 김치 통, 귀여운 얼굴 모양에 뚜껑이 모자인 젤리 과자 통, 원터치로 열리는 다 쓴 물티슈 통, 튼튼한 선물 상자, 아니면 신발 박스나 크리넥스 빈 곽으로 저금통을 만든다. 바깥에는 “한글 저금통”이라고 써주고 뚜껑 부분에는 얼굴을 크게 그리고, 입은 칼집을 내어 종이가 쏙 들어가게 만든다. 한글을 저금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엄마 아빠와 대화를 하다가 모르는 말이 나오면 작은 메모지에 적고 “소리 내 읽은 후”에 저금통에 넣는다. 한국 식품점에서 사 온 한국 식품이나 물건의 포장지에서 한글을 오려서 “소리 내 읽은 후”에 저금통에 넣는다. 중요한 것은 한글을 보물처럼 찾아내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읽어보는 것, 소리내어 읽은 후에는 한글 저금통에 보관한다. 그리고 수시로 어떤 한글 낱말들이 저금 되었는지 열어서 다시금 소리 내어 읽어보는 놀이다.
뜻밖에 학부모님들로부터 문자 메시지 세례를 받았다.
“오늘 한글 저금통도 재밌게 만들었습니다! 한글 많이 써서 한글 저금통 배부르게 한다고 벌써 저만큼 썼어요. 어제 한글학교 친구들을 봐서 그런지 생각나는 친구들 이름도 적어서 넣었어요.”
“학교 다니면서 점점 한국말이 줄어서 걱정했는데 한글 저금통 만들고 해보면서 조금이라도 생활에 더 쓸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감사합니다!! 한글저금통, 너무 재밌게 사용하고 있어요. 애들이 원하는 단어 있을 때마다 적어 줬어요. ㅎㅎ~~~”
“선생님, 좋은 아이디어 감사합니다.”
엄청난 피드백을 받고 가슴이 마구 뛰었다. “한글 저금통”은 재미와 배움이 동시에 일어나는 한글 수업에 대해 고민하고 도전해서 얻은 첫 번째 성과였다.
코로나 사태 이후에 현지의 모든 한국어 학교가 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봉사하는 한국어 학교의 교장 선생님께서는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무료하게 집에서 갇혀 있는 우리 동포 아이들에게 온라인 역사 캠프를 만들어 주자고 교사 회의에서 제안하셨다. 2020년, 올해는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이면서, 광복 75주년이 되는 해로서 [우리나라를 지킨 위인들]이라는 주제로 세 개 한국어 학교가 연합하고 한국에서 유명 역사 강사도 섭외하는 등 발 빠르게 준비에 착수했다. 보통으로 하는 길어야 3박 4일 일정의 캠프가 아니었다. 우리가 계획한 역사문화 캠프는 장장 3주간, 9차시, 총 36시간의 수업 구성으로 본 수업 강사들이 열 명, 한국으로부터 두 분의 특강 강사가 초청되었고, 이곳 현지에서 두 분의 전쟁 참전 용사가 특별 강연에 참여해주셨고, 각 여섯 반의 온라인 교실에는 총 20여 명의 보조 교사들이 투입되었다.
역사문화 캠프 소개에서 나의 수업 시간을 빼놓을 수 없다. 재미와 유익함을 동시에 추구하는 나의 수업, 첫 수업 시간을 임팩트있게 할 수 있는 주제는 과연 이순신 장군과 천하무적 거북선이었다. 인터넷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수많은 재료 가운데 유아들을 위한 수업 자료도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나의 자존심은 거저 얻어다가 흉내만 내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일단은 이순신 장군을 색칠하기 활동지로 만들자. 하지만 그냥 색칠하기는 재미가 없다. 게다가 이순신 장군의 표정이 무표정이다. 내가 원하는 표정은 “적들을 물리쳐라!”라는 표정이다. 그래서 그림 그리기 선수인 둘째 딸에게 주문했다. 이순신 장군을 그리되 표정은 이렇게 해달라고. 우리 집의 둘째는 “무엇이든 그려주세요”가 가능한 장래 희망이 게임 디자이너이시다. 그래서 순식간에 무엄하고도 용맹스러운 얼굴의 이순신 장군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아쉬웠다. 동상속의 이순신 장군이 장검을 들고 심심하게 서 계신다. 내가 원하는 모습은 장검을 위로 쳐들고 적진을 향해 돌진을 명령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장군님의 한쪽 팔을 몸통에서 분리시키기로 하였다. 분리된 팔은 서류철 끼우개로 다시 몸통에 연결되도록 한다. 이순신 장군의 팔이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돌격하라”를 실감나게 연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만들기 동영상을 촬영하였다. 색칠하고 오려서 만들 수 있는 활동지를 집에서 인쇄해서 수업 준비할 수 있도록 아이들 부모들의 이메일로 전송했다.
그리고 대망의 거북선. 역사 캠프를 준비하는 단계에서 가장 먼저, 가장 오랫동안 고민했던 부분이 거북선 만들기였다. 우리 집에 차고 넘쳤던 재활용 프로젝트 재료 중에서 12개들이 계란판이 낙점되었다. 그리고 이쑤시개는 거북선의 화룡점정이었다.
“선생님 거북선 만들면서 즐거운 오후를 보냈습니다. 😊 아이들이 거북선 만들기 정말 즐거워했어요~ 큰 아이는 신기하고 너무 멋있어서 계속 거북선을 들여다보고 있네요.”
뭐니 뭐니 해도 역사 캠프의 하이라이트는 한국전을 참전하신 캐나다인, 랠프 대코스트(Ralph Decoste)님과 이우석, 6.25 참전 유공자회 회장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었다. 두 분의 참전용사가 학교 장소로 사용되었던 한인교회 안에 세워진 캠프본부에 도착하셨을 때, “강연을 들을 학생들은 어디 있나요?” 라고 질문하셨고, 이에 우리 교장 선생님께서는 노트북을 가리키며, “이 안에서 모두 기다리고 있어요.”라고 대답하셨다고 한다. 그만큼 온라인 강연회는 아흔 연세의 그분들에게도 실로 새로운 시도였을 것이다. 역사캠프 고학년 담당 교사 두 명에 의해 채팅 창 위에는 영어와 한국어 동시통역이 학생들에게 흥미진진하게 생중계되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나간 끝에 우리나라를 지켜낸 그분들의 생생한 증언을 학생들은 숨죽이며 경청했고, 한 여학생은 “우리가 사는 현재의 삶이 이처럼 용감한 분들에 의해 지켜진 소중한 것”이라며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70년 전, 스무 살의 젊은이였던 그분들이 지금은 아흔이 넘는 백발의 노인이 되어 한국도 아닌 캐나다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어린 친구들에게 “역사”의 의미를 가슴 깊이 아로새기게 만드는 시간이 되었다. 멀리 토론토에서 역사 캠프에 참가했던 한 선생님은 “생존하시는 역사의 증인들의 소중한 이야기를 우리끼리만 들어서 너무 아쉽다. 목숨을 걸고 싸워 나라를 지켜낸 저분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없었다며 앞으로 우리 후손들에게 교육해야 할 소중한 시간에 동참하게 되어 감사하다.”고 소감을 전하셨고, 한 캠프 참가자의 어머니는 온 가족이 함께 모여 강연을 들었는데 캐나다에서 이처럼 우리의 역사를 배울 수 있어서 특별하고 우리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 있어서 뿌듯했다고 감사함을 전했다.
모든 순서의 마지막을 장식한 캠프의 폐회식은 정말로 특별했다. 저학년 캠프 참가자들에게 “대한민국을 지킨 위인 상”이 수여 되었는데, 한 명 한 명의 아이들 얼굴을 각 이순신 장군, 유관순 열사, 안중근 의사의 일러스트 안에 합성하여 참가자 모두가 우리나라를 지킨 위인이 되어 보는 것이었다. 이 특별한 수료증을 내가 제안하였다. 모든 순서가 온라인 수업이었기에 온라인으로 전달 가능한 선물을 고민하다가 이런 생각을 해 본 것이었다. 총 110여 명의 참가자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부르고 그 수료증을 수여 하였다. 또한, 3주 동안 이뤄진 영상수업 캡처와 만들기 과제 사진을 가수 이선희가 2018년 평양에서 부른 “아름다운 강산” 노래에 얹어 다함께 보면서 갈무리하였다.
고학년 캠프 참가자들의 설문 통계 발표도 인상적이었다. 온라인 수업에 대해 뜻밖에도 높은 만족도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우리 재외 교포 아이들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관심이 생각보다 많았고, 더 배우고 싶다며 역사캠프가 끝나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도서관, 체육관 등 모든 공공시설이 문을 닫았다. 뉴스에서는 계속해서 개학이 연기되었다. 그럼에도 시작된 우리의 온라인 한국어 수업, 그리고 온라인 역사 문화 캠프. 온라인 수업이기에 장소 이동을 생략하여 에너지를 절약하면서도 인터넷상에서 장거리, 장소 불문 접속할 수 있었다. 모니터 앞에서의 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증명해낸 셈이었다. 온라인으로 서로 화면상으로만 만났음에도 어느덧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되고 서로의 얼굴을 익히게 되었다는 것도 이 시대가 준 선물은 아닐는지. 하루는 동네의 한인식료품점에 장을 보러 갔다가 온라인 수업에서 만난 어린 친구를 만났다. 서로 마스크를 썼기에 처음에는 누구인지 몰라 긴가민가 하는 순간이 있었으나 어딘지 친숙한 얼굴을 보며 이윽고 이름을 떠올렸고 인사를 나눴을 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시울이 뜨거워진 것을 알았다. 어떤 친구들은 캠프를 시작할 때 역사는 어렵고 재미가 없을 거로 생각했다 했다. 하지만 의외로 알차게 준비된 온라인 수업을 참여하면서 아이들은 한국 역사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중에는 온라인 수업을 가능하게 한 코로나가 좋은 점도 있다고 소감을 나눈 친구가 있을 정도였다. 처음 시도한 일, 가보지 않은 길을 만들어 가며 개척한 일이었다. 교육이라는 길, 바로 온라인 이라는 방법으로 말이다.
조국을 떠나서 해외에 나와 살면 모두가 애국자가 된다는 말을 실감한다. 이역만리 타향 땅에 뿌리 내려 살고는 있지만 내 아이들에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어떻게 심어줄 수 있을 것인지 이민자 부모라면 누구라도 고민할 것이다. 더욱이 지금은 온 세계가 한국문화에 매료되어 한류라는 흐름으로 대유행하는 이 시점에 나는 “한국인”이어서 자랑스럽다. 나의 주변엔 잡채를 만들어 달라고 하고, 집 김치를 만들어 달라고 하고 재밌게 본 한국 드라마를 추천해달라고 한다. 하다못해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 모르는 사람이라도 나는 한국 사람이라고 소개를 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스스럼없이 “안냐세요?”라며 자기가 아는 서툰 한국말을 던진다. 때로는 “배고파요”, “언니”, “오빠” 정도는 처음 만나는 사이임에도 어색함을 깨는 한국말이 된 것이다. 요즘은 어떤 한국드라마를 보고 있는 지로 시작하는 대화가 일상적이고 동네 체육관에 가도 한쪽에서 십 대들이 한국의 가요 음악에 맞춰 춤 연습을 하고 있다. 내가 한국 땅에서 살지 않을 뿐, 나는 한국인이라서 지금 행복하다. 이제는 부모로서가 아니라 한국어 교사라는 이름으로 행복하다. 우리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의 얼을 가슴속에 심을 수 있게 도울 수 있는 교사가 되고 싶다.
인류가 가히 처음으로 겪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이 앞으로 얼마나 더 길게 갈지는 예측할 수가 없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는 받아들이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이제는 같이 가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적 거리 두기와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는 세상, 우리 아이들은 비대면 온라인으로 살아야 하는 현실 앞에 서 있다. 온라인 수업의 한계는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내디딘 한 걸음으로 인해서 나 다음 사람은 좀 더 수월하게 전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디며 나는 이번 주말에 있을 온라인 수업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