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최근 캐나다 재향군인회에서 이메일을 받았는데 “현충일이 곧 올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기억할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하지만 내 대답은 11월 11일에 누구를 기억할까요?이다.
예전에 커뮤니티 모임에서 가끔 만났던 사람이 있다. 그녀는 나이가 많고 항상 친절하고 정중했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는 절망과 공포에 휩싸인 1950년 겨울, 서해안에 섰을 때 시작되었다. 해안에는 캐나다 왕립 해군의 구축함 3척을 포함한 UN의 선박이 정박해 있었다. 거센 폭풍우 속에서 진남포항에서 군인과 민간인의 열광적인 대피가 일어났다. 그녀는 다가오는 12월의 추위 속에서 다가오는 북한군으로부터 구조되기를 필사적으로 기다렸다.
캐나다 구축함 HMCS Cayuga에는 Able Seaman Vince Liska가 타고 있었다. Seaman Liska는 2차 세계 대전 중 캐나다 상선에서 복무한 전문 선원으로 1946년에 캐나다 해군에 입대했다. 그는 BC(브리티시 컬럼비아)주 출신으로 아내 캐롤과 함께 밴쿠버 섬에 살았으며 나중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의 아들은 그의 아버지가 한국에서 전쟁터에 나가 있을 때 태어났다. 그리고 그들의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과 결코 만나지 않을 운명을 지니게 되었다. 진남포항에서 야간 구조를 하던 중 Able Seaman Liska는 배의 갑판에서 떠내려가 사망했다. 그는 한국 전쟁 중 캐나다 왕립 해군이 입은 첫 번째 사망자다.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전쟁에서 BC주 역할을 조사하던 중 Liska 씨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접하고 가슴이 먹먹했다. 나는 더 알고 싶어 리스카와 같은 이름을 가진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그의 아들이었다. 그 이후로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 많은 대화를 통해 친해졌다. 그의 태도는 항상 친절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불안하고 슬퍼 보였다.
어느 날 리스카 씨는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고 싶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그의 아버지에 대해 읽은 모든 것에서 빠진 모든 것의 공백을 채워 줄 것 같다고 했다. 느리지 않은 말로 그는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아버지는 겨울 폭풍우 동안 배의 갑판에서 정말로 떠내려간 것 같았지만, 그가 어떻게든 배 옆에 매달려 있었고 배의 선원들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정은 얽힌 몸을 풀고 풀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의 아버지는 찾을 수 없는 물에 빠지고 말았다고 말했다. 이것은 어떻게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의 아들이 마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모든 세부사항, 일어난 모든 순간을 알고 있었고 그의 기억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는 실화였다.
리스카 씨는 정직하고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을 가슴에 짊어지고 가족의 비극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인생에서 성공은 불가능해 보였다. 지난 20년 동안 나는 한국 참전용사들을 돕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고 빈스 리스카의 아들을 도우려고 했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누구의 도움도 원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그에게 전화를 걸지 않아 그가 전쟁과 그가 잃은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것뿐이었다.
적어도 나는 Able Seaman Liska가 헛되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의 가족이 어떻게 비극적으로 변했고 항상 고통을 겪을지 알면서 그 말을 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인 커뮤니티 행사에서 우아하고 친절한 여성을 볼 때마다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항상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인사하고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진남포항만 생각하면 눈에 눈물이 고이고, 그녀를 생각하면 미소가 지어진다.
11월 11일에 나는 1950년 12월 4일에 목숨을 잃은 선원 Vince Liska를 기억할 것입이다. Able Seaman Liska는 한국 전쟁에서 사망하고 무덤이 없는 단 3명의 BC주 사람 중 한 명이다. 다른 두 명의 용감한 BC 주민은 Donald Hastings 상병과 John Burak 일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