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렸을 때 이사를 자주 하였는데 그 때마다 새로 이사간 동네에서 “삼팔 따라지 ”라는 말을 많이 듣곤 하였다. 우리 가족은 1948년 육이오 두 해 전에 이북에 김일성 공산독재정권이 들어서고 바로 시작된 부르주아 숙청작업을 피해 월남 하였다. 부모님은 당시 우리 삼형제 (월남 후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더 보태 5남매가 되었다) 만 데리고 일가 친척에게 알릴 겨를도 없이 친하게 지내던 옆집에 대고도 그저 황해도 해주로 이사 간다고 해 두셨단다.
그렇게 넘어온 남한 땅에서 우리 부모님 심경은 “ 디포 “ 의 소설 속 주인공 “ 로빈슨 크루소 “ 보다 더 막막 하였으리라. 우리 형제는 설 명절 때에 때때옷 차려 입고 고향 간다고 나서던 또래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이북에서 꼭꼭 숨겨온 돈과 아버지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2년 만에 성밖 창신동 (그 당시에는 지금의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을 그렇게 불렀다) 에 집을 장만하여 그 무섭던 셋집 주인의 눈초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뒤로 아버지의 사업이 순조로워 종로구 연건동에 제법 그럴듯한 적산가옥을 마련하여 이사 하였다.
그러나 거기가 끝이었다. 아버지의 계속되는 사업실패로 그때부터 2-3년 주기로 집을 줄여가며 생활 비며 학비를 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초. 중. 고교시절 6번을 이사 하였다. 우리 집 가세가 기울어 갈수록 아버지의 주량은 거기에 비례하여 늘어 갔다. 아버지를 향한 어머니의 잔소리, 바가지는 아버지의 주량의 제곱에 비례 할 정도에 이르렀다. 나는 어린 마음에 그런 아버지가 싫었다. 아버지가 술 마시고 담배 피워 없애는 돈이면 나 하나 정도의 학비는 될 텐데 그렇다면 기한 내에 수업료를 못 냈다고 교실에서 내쫓기는 창피를 당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고학으로 학비를 벌어 학교를 마친 자식들이 사회에 나와 돈벌이를 시작하자 조금씩 가계의 주름이 펴지기 시작했다. 얼마가 지나자 영등포구 변두리 신길동 (당시) 에 방 두 개 부엌 하나짜리 집을 장만 했다. 안방에는 부모님과 막내 여동생 그리고 건넌방에는 셋째와 넷째가 발을 뻗고 잘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그 당시 갓 보급이 시작된 텔레비전도 장만 하였는데 아버지는 뉴스와 스포츠 만 보셨고 동생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하시었다. 일찍이 텔레비전의 폐해를 깨달으신 몇 안되는 분이셨다. 반대로 어머니는 잠시도 쉬지 않고 이 방송국 저 방송국을 넘나들며 연속극이란 연속극 은 모두 시청하셨다. 그러다 어느 날 채널을 바꾸는 손잡이가 떨어져 나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일로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크게 싸우셨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너무 텔레비전 채널을 혹사(?) 시켜서 그렇게 됐다고 하셨고 어머니는 원래부터 불량품인데 아버지가 속아서 사온 것 이라고 맞받아 쳤다. 내가 보기에는 양쪽 주장이 모두 맞는 것 같았다. 그땐 지금과는 달리 한국의 텔레비전 제작 기술이 선진국 수준에 한참 못 미칠 때였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막내 여동생 마저 결혼하고 나니 신길동 집은 안방은 어머니 차지, 건넌방은 아버지 차지가 되었다. 그 시절 신길동 집에 가면 아버지는 아침, 점심, 그리고 저녁 매끼 반주로 진로소주 반 병을 마시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머니의 잔소리는 많이 줄어 들었다. “ 쌀독에서 인심 난다 “ 라는 말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었다. 어떤 때에는 어머니께서 “ 너희 아버지 죽으면 진로회사에서 부의금 두둑이 내야 할 거다. 평생 너희 아버지만큼 진로소주 많이 애용하고 선전 해준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 “ 고 농담도 하셨다.
공산당이 싫어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목숨을 걸고 월남하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정부가 반공을 국시로 내걸기 전에 이미 철두철미 반공주의자 이셨다. 나의 입대 전날 저녁에 나를 부르신 아버지는 다른 부모들과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아버지께서는 “ 이 땅의 젊은이라면 누구나 군대를 갔다 와야 하니 너는 목숨을 국가에 바쳤다는 각오로 군대생활을 열심히 하고 돌아오기 바란다. “ 고 격려를 하여 주셔서 은근히 비상금(?) 을 기대하던 나를 크게 실망 시키셨지만.
아버지께서 하루는 동네 막걸리 집에서 어느 분과 크게 다투셨다. 그 발단은 그분의 자식이 곧 군대에 가게 되었는데 어떻게 요령 있게 빠지는 방법이 없는지 묻다가 “ 아니? 그럼 자식을 기피자로 만들 셈이냐? “는 분노하신 아버님의 일갈에 “ 남들 다 빠지는데 내 자식도 좀 피해보자는데 당신이 뭐 그리 화 낼 일이냐? “ 고 그 분이 대꾸하면서 였다고 한다. 이런 아버지 덕에 우리 4형제는 모두 씩씩하게 군 복무를 필 했고 그 중 한 명은 월남전 참전용사가 되었다. 이런 사실을 아는 동네어른 중에는 제대로 된 병무청장이라면 바로 이런 집을 찾아 표창을 해야 된다고 말씀 하신 분도 있었다.
아버지는 큰 병도 없이 마지막 3개월 정도 대장암으로 고생하시다 79세에 “ 삼팔 따라지“로 외롭고 쓸쓸한 일생을 마치셨다. 물론 진로소주 회사의 부의금 전달도 병무청장 표창장도 없었다. 평소에 전혀 말씀은 안 하셨지만 북에 남겨진 부모형제가 무척 그리웠으리라.
장례를 치르고 유품을 정리한 형이 이미 이곳 밴쿠버로 돌아온 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곤 아버지야 말로 “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간다. “ 는 성현의 말씀을 몸소 실천하신 엄청 훌륭하신 분이 셨단다. 그 흔한 은행통장 하나 없고 신길동 집은 재빠른 어머니께서 진작에 손을 쓰셔서 어머니 명의로 되어 있었다. “ 정말 정리 할 게 하나도 없었다. “ 는 말을 하고 형은 전화를 끊었다.
약 일년 뒤 내가 한국을 방문 하는 길에 우리 5남매가 저녁때 형 집에 모였다. 모두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모하며 한잔, 두 잔 주고 받고 하다 보니 어느덧 날이 뿌옇게 밝아 왔다. 막내 여동생 만 빼고 4형제가 밤을 새워 술을 마시며 아버지의 인생을 되 새겨 본 것이었다. 그 때 우리 형제의 결론은 “살아 생전 아버지의 술 한잔은 반은 아버지의 한숨이고 나머지 반은 아버지의 눈물 이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모두 모여 웃고 즐기며 밤 새워 술 마실 수 있는 것이 모두 아버지께서 평소 적극 지지하던 “ 자식에게 유산 안 물려주기 운동 “을 몸소 실천하신 덕이었다고. “
남긴 재산이 없으니 남들처럼 형제끼리 재산싸움을 할 건덕지가 아예 없어진 것이다. 그런 우리 아버지 덕에 오늘날까지도 우리 5남매는 화목 그 자체이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