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가정 형편을 이겨낸 고학생의 이야기엔 늘 신문배달의 이야기가 있었다. 하루에 150부에서 300부까지 배달을 하는 신문배달은 마땅한 아르바이트 자리가 없는 학생들에겐 아주 고마운 존재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오늘날 전철에서 저마다의 스마트폰을 들고 뉴스를 보거나, 영상을 보고, 또는 게임을 하면서, 음악을 들으며 출근하는 모습에서 신문을 쫙 펼쳐서 옆에 앉은 사람에게까지 피해가 가던 시절이 떠오른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타는 서울의 지하철, 푸시맨까지 등장하던 그 복잡한 지하철에서 저마다 스포츠 신문과 조간 스포츠를 들고 하루를 시작하던 일이 아주 오래전 일은 분명 아닌데 왠지 미래의 사람이 과거로 돌라 간 듯한 광경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아는 사람이라고는 하나 없는 낯선 곳 캐나다에 뚝 떨어져서 기대와 흥분도 있었지만 직장을 구하지 못해 애태우던 내가 그곳에 있었다. 밴쿠버 선과, 프로빈스를 사서 구인란을 정독을 하고 뉴스는 큰 타이틀만 쭉 훑어보던 시절의 나는 희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이력서를 수십 장 복사하고 자기소개서를 복사해서 우편으로 보내던 때는 언포쳔틀리라는 단어만 봐도 떨어진 것을 알았다. 그래도 얼마나 낭만이 있던 시대였는가? 이력서를 보내고 기대를 품고 최소한 일주일 정도는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던 나날들이었다. 그러다 팩스로 보내는 구직이 늘었다. 팩스가 그냥 휴지통이나 파쇄기로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우편으로 보내는 곳도 섞여 있던 시절은 신문에서 나는 그 인쇄물의 냄새가 희망이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일주엘에 한 번 킹스웨이에 위치한 한국식품점에 가서 한국 드라마 비디오테이프를 빌리고 시장을 보던 것이 삶의 한 부분이던 시절에 비디오테이프로 보던 드마마가 이민자의 가슴을 울렸다면 고국의 소식과 캐나다의 소식을 한글로 볼 수 있는 신문은 그 순간만은 다른 생각을 않고 행복에 젖어들게 하는 순간이었다. 광고도 일부러 찾아보는 광고가 있으니 식품점의 세일 광고를 비롯해서 어느 식당이 오픈했는지, 어느 부동산에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는지 찾아보는 재미도 솔솔 했다. 그러던 것이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언젠가부터 쇼핑을 하고도 신문을 챙기지 않는 날이 늘어 갔다. 드라마를 보던 비디오 가게가 사라진 것처럼, 신문도 이렇게 사라지게 되는 것은 아닌지 스마트 폰이 바꾼 아니 신기술들이 바꾼 세상은 어쩌면 우리에게 편리함과 세계를 연결해준 고마운 존재이긴 한데 행복을 지워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문인협회에서는 매주 한국 신문에 글을 게재한다. 물론 콘서트 같은 정보도 신문에 광고가 나온다. 우린 신문을 통해 최소한의 문화생활을 영유해 왔던 것은 아닐까? 때론 읽고 싶지 않은 광고나 기사도 있지만 그런 기사도 실어 주는 신문이 있었다. 마치 야채가게에 구색을 갖추어야 매대가 살아나듯이 싫은 것 내가 원하지 않은 것도 함께 있어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과 같은 것은 아닐까?
지금은 스마트 폰 시대, 뉴스는 스마트 폰안에 구글 뉴스로, 다음 뉴스로, 네이버 뉴스로, 내가 원하는 기사들로 여러 신문과 방송의 기사들이 좌르르 눈 안에 들어온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볼 필요도 없고, 크릭 해서 없애거나 숨겨 버리면 다시는 그런 류의 기사는 내 시야에서 어른거리지 않게 된다. 사설이 신문의 얼굴이었던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고도 한다.
하지만 누가 요즘 종이 신문을 보니, 하는 말과 더불어 누가 요즘 사설을 보니라는 말은 일맥상통한다. 종이 신문을 보지 않는데 누가 사설을 읽을까? 인터넷 신문과 유튜브 방송을 통해서 그리고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틱톡 등을 통해서 사고 현장이 생중계되는 경우가 많고 신문보다 방송보다 훨씬 빨라서 유튜브나 SNS를 통해서 기사를 작성하기도 한다. 물론 기자는 발로 뛰어 살아 있는 기사를 만들어야 하지만 누구나 가지고 있는 스마트 폰으로 인해 신문이나 방송기자보다 개인의 SNS가 늘 한 발 앞서 가게 된다. 물론 여기서 원치 않는 개인의 사생활 정보도 대중에게 오픈되는 경우가 많다. 받아 쓰기 하는 기래기 기자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각종 관공서에서 단체에서 보도자료를 뿌리는 것을 받아서 신문에 기사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론 살아 숨 쉬는 현장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담은 개인의 뉴스가 사람들을 울리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관이 주도하던 언론통제가 통하지 않는 SNS시대인 것이다.
난 지금도 종이 신문의 냄새를 좋아 한다. 하지만 종이 신문 가판대는 우리 주변에서 사라졌다. 무료 신문을 나누어 주던 전철역 앞의 사람들도 없어진 지 오래다. 물론 COVID-19가 그것을 가속화시킨 측면이 있다. 모든 행사는 줌을 통하거나 유튜브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다 이 온라인 세상이 고착화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상현실이라는 온라인의 세계가 실존하는 세상을 무너트리고 있는 중이다. 신문사들은 구글이나, 다음넷, 네이버 같은 포털에 자신들의 기사가 올라가길 바라고 있다. 그래서 포털은 사용료도 내지 않고 신문사들과 방송사들의 콘텐츠로 돈을 번다.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 물론 신문사들은 광고효과에 침묵하지만 결과적으론 공룡이 소규모 신문이나 방송사를 앵벌이로 이용하는 꼴이다.
하지만 신문사들은 작은 인터넷 신문사 등에서 자신들의 기사를 인용하거나 공유하면 바로 소송하기도 한다. 새로운 질서가 탄생 중이라고도 한다. SNS가 양방향 소통의 장이라고 하지만 유명 연예인이 같은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의 친구라고 해서 얼마나 소통이 이루어 질까? 인터넷에 올라오는 기사들은 특히 포털에 올라오는 기사들은 빠르게 기사가 바뀐다.
한때 문제가 되었던 검색어 1위에 올라온 기사들은 대부분이 미담 기사보다는 누군가의 드러내고 싶지 않은 숨기고 싶은 모습들이었다. 연예인과 드라마, 음악 등은 연예기사를 다 채우고 그것은 다시 유튜브를 통해 리바이벌되기도 한다. SNS에 댓글에 마음에 중상을 입고 세상을 등지는 연예인도 많다. 순식간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다 아는 소식이 되기도 하고 그로 인해 쏟아진 물처럼 잘못된 정보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싫은 기사도 미담도, 정부의 정책도 한자리에 모인 종이신문이 사라진다해도 그것을 대체할 온라인상의 또 다른 매체가 생겨 났으면 한다. 책도 인터넷으로 읽는 시대 점차 종이는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우체통에 쌓이는 광고지처럼 인터넷 기사나 광고는 짧은 수명과 그 비용이 단가가 높은 이유로 그리고 광고효과의 의문으로 남는다.
요즘 누가 종이 신문을 봐라는 말은 가끔은 드라마에서도 나오는 말이다. 그만큼 요즘 세대의 가치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노인네 문화로 취급되고 있기도 하다. 스마트 폰이 게임을 하려고 사양을 점점 높인 것이 아니고, 컴퓨터가 고급사양으로 게임을 하기 위해 개발된 것은 아님에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내 입맛에 맞는 뉴스와 영상만을 보는 편식의 시대에 우리는 건강에 좋은 것은 입에 결코 달콤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면 결국은 도태되어 버리는 것이 당연하지만 종이로 된 책을 읽는 일이, 종이로 된 신문을 보는 일이 시대에 뒤떨어진 취급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차피 종이 신문도 비디오테이프 드라마처럼 사라져 가겠지만 책장이 사라지고 스크린과 컴퓨터만 덜렁 남은 거실이나 서재가 우리의 미래라 해도 종이 신문이 갖는 특성과 좋은 점, 그리고 종이 책이 갖는 장점은 남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