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말이지 타고 난 음치다.
음치의 3박자를 모두 갖추었다.
음정, 박자 무시하고 소리 높여 부르는 노래. 노래방이 한국에선 음주 가무에 꼭 끼는 요즘.
난 어머니가 불러주던 자작송 삶에 대한 노래를 기억하려 애쓰지만 기억이 나지 않고 그 느낌만은 기억한다. 노래는 삶이 힘들때 활력소가 되어준다. 감정을 자극하는 것도 노래가 한 몫을 단단히 한다. 눈이 올라 나비가 올라 나라고 시작되는 강원도 정선 아리랑이라던지 아버지가 술 먹고 오면 부르던 노래는 일본 노래… 물론 그것을 잘 부른다고 느끼진 못했다. 결국 아버지 어머니 피를 이어받아 음치가 된 것이 많는 것이다.
한 때는 다리에서 주워 왔다는 어머니 말을 그대로 믿은 적이 있다. 그래서 제천의 모란다리 아래에 내려가보기도 했다. 여기가 날 주워 온 장소구나 하고. 손위 누이와 나의 나이 차이도 그것을 믿게 하는데 도움 이 됐다. 누나는 날 어머니 대신 업어서 기른 어머니 대신이었지만 어린시절엔 누나를 많이도 괴롭혔다. 남자는 어려도 완력이 세니까…
중학교때 음악시간에 노래를 부르는 음악시험이 있었다. 지금이야 아이들을 어릴적부터 피아노 과외 다해서 교육을 많이 하지만 당시엔 논에서 밭에서 일하는게 학교 일과후의 일정이었다.
게다가 음악에 음표 조차 머리에 잘 들어오질 않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검은 것은 글씨요, 하얀 것은 종이다 라는 말처럼 콩나물 대가리만 줄줄이 있는게 전혀 이해가 가질 않는거다. 물론 수학도 이해 안 가기는 마찬가지지만 수학 선생님은 혼자 칠판에 열심히 뒤도 안 돌아보고 문제를 풀고 난 절반을 노트에 받아 적으면 선생님은 지워버리고 그러니 그 수학의 원리에 대해 이해했을리가 만무했다. 받아쓰기도 바쁜 와중에 이해라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수학은 무조건 외우는거라고 수학을 잘 하는 동료학생이 말해줬지만 국민교육헌장 외우는 것도 힘이 들었는데 아무런 느낌도 감동도 없는 수학공식을 외우기란 정말 힘든일이었다. 그러니 수학을 기본으로 하는 과학에도 관심도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고 생물은 아메바라든가 현미경으로 보는 미생물에 관심이 많았다. 지금 나는 그 당시 나의 처한 상황을 설명 중이다.
그리고 음악시험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자면 가곡을 부르는 시험에 나도 한 곡 뽑았다. 피아노로 반주를 맞추던 선생님이 인상이 안 좋아져서 다시 부르자고 했다. 말하자면 기회를 준 것이다. 다시 불러도 음정 박자 안 맞고 소리만 질러대던 것은 여전했나보다. 음악 선생님의 손이 내 빰에 쩔썩하고 지나갔다. 순간 눈에 눈물이 휑하니고였다. 그리고 내가 왜 맞았는지에 대해서 궁금했다. 답은 선생님이 했다. “너 지금 장난치냐.” 장난이 아니고 난 최선을 다한거예요 하 고 말하고 싶었지만 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후로 음악시간에 음악실에 가는게 지옥에 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음악시간을 빠질 수 없을까 생각하고 사격부에 지원을 했는데 손이 떨린다고 안 된다고 했다.
푸시업에 엄지 검지 손가락 2개를 이용한 푸시업까지 하라고 하니 당시에도 덩치에 비해 몸무게가 부담이 되었던 상황이라 그런 듯하다. 그리고 미련없이 포기했다 . 집에서 학교까지는 6키로가 넘는 거리를 걸어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자전거를 사기 위해서 버스비 받은 것을 아껴서 결국은 자전거를 샀다. 자전거를 타고 통학을 하니 걷는 것보단 훨씬 좋았다. 까까머리들이 까만 교복에 까맣게 교복을 입고 카라만 프라스틱으로 된 것을 꿰메어 대고 한문 중자가 새겨진 모자를 늘 가방 가운데 끼고 다니던 당시엔 상급 학년의 선도부가 폭행을 하던 시절이었다.
단체기합이라고 책상에 무릅 꿇고 손 들고 있는 것은 기본었던 당시 동급생 중 하나가 어떤 물건을 잃어버려서 우리 반은 범인이 나올 때까지 오리걸음 토끼뛰기 등 온갖 어려움을 겪고 저녁 8 시 깜깜해질 때까지 힘든 시간이었던 적도 있었다.
제천 경찰서 수사과장 아들이라는 아이가 목을 졸라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하기도 했던 당시엔 학생들 사이에 좋은거 구경해 줄 거라는 그저 한가지 놀이에 불과한 위험한 놀이이기도 했다.
음치의 부정적 이미지는 당시의 모든 것을 떠올리게 하는 트라우마 같은 것이다. 나는 노래 부르고 듣는 것을 즐겨한다. 춤 추는 것도 좋아해서 흥이 많다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노래를 할 때마다 사람들의 반응이 싸늘 할 때마다 중학교 때 가곡을 부르고 빰을 맞던 트라우마가 떠오르는 것은 아닌지하는 생각이 든다. 어린시절의 기억은 오래도록 기억된다.
그리고 평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영향을 미친다.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잘 할 수 없다. 누군가 팔방미인처럼 노래도 공부도 다 잘하는 사람이 있다면 결국은 그 중에 하나가 끝까지 살아남아 그 사람의 평생과 함께하지 않을까?
공부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고 운동도 씨름부 육상부 태권도부 등 여러가지를 해 봤지만 튐틀을 할 때마다 허벅지에 튐틀이 닿았고 회전은 엄두도 못 냈던 기억씨름도 기술을 하나도 배우지 못해 늘 작은 체급에게도 지던 그 아이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것은 따로 있었다.
음치라고 뺨을 맞던 그 학생이 좋아하는 것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얼마전 새벽에 시를 쓰고 있는데 아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글을 쓰고 싶을 것을 어떻게 참고 지냈냐고 물었다. 이민 전엔 학교 다니고 직장 다닌다고 그리고 결혼하고 생활하다보니 여유가 없었고 이민 와서는 정말 정신없이 사느라나를 잊고 산 것 같다.
지금도 자주 기회가 오는 것은 아니지만 노래방에 갈 기회가 있으면 춤추면서 다른 사람들 흥을 높여 주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흥얼대면서 노래를 따라하는 것도 좋아한다. 하지만 내가 마이크를 잡는 순간 음정 박자 모든 게 무시가 된다.
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따라하려고 노력해보지만 안 되서 그런 걸 나는 안다. 한 동안은 음악시간에 맞은 뺨에 대한 생각이 노래를 하려고 준비하면 연상되곤 했다. 가수가 아님에도 다들 가수처럼 정말 잘 부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주눅 든 마음을 감추려고 더 허허 웃는 것은 아니었는지 하는 마음도 있다. 어릴적에 음악 선생님한테 맞은 빰은 사실 그때까지 부모님한테도 한 번도 맞은 적이 없어 더 충격이 컸던 듯하다.
어릴적엔 무얼 잘 하는지 찾기가 쉽지 않다. 물론 두드러지게 잘 하는게 있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은 실패를 통해서 자신이 잘 하는 것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이 사진기를 평생 보지도 못하고 사라진 경우도 많을 것이다.
일제시대나 경제개발 시대에 형편 때문에 집에 사진기 하나 없어 사진을 찍을 수 없었을 많은 사람들. 요즘은 핸드폰에 카메라가 있어서 사진을 자주 접하게 된다.
누구나 전문가처럼 사진을 비슷하게 찍는 시대다. 결국 시대적 상황과 그 사람의 특기가 잘 맞았 을 경우 더욱 빛을 발하게 되는 것 같다.

전재민 칼럼facebook_밴쿠버 교육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