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면 잊혀진다지만 오히려 더욱 생생히 기억되는 것도 있는 것 같다.
30여년전 이맘때쯤인데 인편으로 외할머니로부터 선물이 왔다. 부피도 무게도 꽤 되었다. 꼭꼭 묶은 포장을 조심스레 풀어냈다. 그런데 펼쳐진 순간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찌른다. 여름에 덮으라고 보낸 얇은 이불 속에 넣어진 비닐봉지로 싸인 것, 냄새는 거기서 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걸 보는 순간 그것이 무엇인가가 짐작이 되면서 왈칵 눈물부터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주름살투성이 외할머니의 얼굴이 눈 안에 가득해졌다. 어쩌다 서울 가는 인편이 있다는 말을 듣자 이내 부탁을 해놓으셨을 테고 보내줄 것을 챙기느라 얼마나 다급하셨을까. 무엇을 보내줄까 하고 또 얼마나 애를 태우셨을까.
할머니는 아주 작은 생명도 못 죽이는 분이시다. 그러니 다들 잘 해내는 닭 모가지 비틀기란 엄두도 못 내실 일이다. 그런데 내게 삶은 닭을 보내신 것이다. 동네 누군가에게 부탁하셔서 닭을 잡고 삶아 이렇게 보내셨을 터였다.
한 여름은 아니지만 요즘처럼 교통도 좋지 않은 천리길 먼 길에 직접도 아닌 남의 손과 발을 빌리는 것 아니던가. 더구나 가져온 사람이 하루를 더 묵힌 후요, 좋다는 것을 이것 저것 듬뿍 넣어 삶은 닭을 비닐봉지에 담아 이불 속에 넣었으니 그게 어찌 상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한시도 잊지 못하는 외손자가 사는 곳에 사람이 간다는데 어찌 그 기회를 놓칠 수 있었으랴. 뭣이라도 보내줘야겠다는 절박한 사랑의 마음뿐이었을 테니 그 다음 일은 생각이나 하셨겠는가. 그러니 내게는 먹을 수가 없게 되었건, 먹을 수 있는 것이건,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할머니의 그 마음, 그 표정, 그 안타까움과 반가움이 그대로 눈에 보듯 전해져 와 그 애틋한 사랑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천명의 나이를 지난 지금에도 아니 나이가 더 들어갈지라도 더욱 그리워지고 그리워질 것들, 더욱 가슴 저리도록 안타까워지는 것들, 그것은 내가 살아온 삶 내내 비벼댈 의지의 언덕이었다. 그러나 나는 받기만 했지 정작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한 아쉬움과 해드리고 싶어도 이젠 해드릴 수가 없는 슬픔에 목이 매인다.
나는 할머니가 보내주신, 못 먹게 되어버린 닭을 도저히 그냥 버릴 수가 없었다. 냄새나는 그것을 방안에 둔 채 할머니께 먼저 편지를 썼다. ‘할머니, 보내주신 닭은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한 번에 다 먹지 못하여 남은 것은 다시 끓여 다음 끼까지 먹었습니다.’
그랬을 것이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본 듯이 짐작할 수 있는 생활, 어려운 70년대 초, 이른 나이에 결혼이라고 했지만 제대로 생활이 안 될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을 터이니 그 성정에 내 생각을 하시다보면 매 끼 식사라도 제대로 하셨을까. 먹고 싶어도 손자 생각하며 자제하셨을 테고, 좋은 게 생겨도 못 먹게 되어 버리게 되기까지도 손자 생각나서 못 드셨을 터였다. 내가 할머니께서 보내주신 선물을 받고 눈물이 쏟아졌던 것도 그 때문이지만 사실 그 때 내 눈물 속엔 지금껏 생각해도 그때만큼 감사하고 행복했던 적은 없었을 것 같은 감격의 눈물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고 보면 내 삶 중의 행복들은 눈물나는 것들 만인 것 같다. 어머니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할머니로부터 몇 갑절 받으며 살았던 내 유년 속엔 그래서 여리디 여린 새싹 같은 초록 그리움들이 계절에 관계없이 싹이 트고 잎을 피운다.
행복한 그리움이란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이 기억 속에 무한대의 교감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행복이란 말처럼 귀하되 흔한 말도 없을 것 같지만 그 행복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것은 그것들이 크고 거창한 것, 아주 멀리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때문일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하찮은 것들에 더 마음을 쓰고 소중히 한다. 덕택에 아내와도 곧잘 부딪힌다. ‘그까짓 것’, 나는 그런 그까짓 것에 대단히 예민하고 병적이다 싶게 애착을 갖는다. 그러나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가졌다고 하는 것들에 큰 것은 없다. 모두 작은 것들이다. 그 작은 것들을 하찮은 것이라고 빼버리면 내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큰 것 보다 작은 것, 거창한 것보다는 남들이 보기에 심히 하찮고 사소한 것, 그것들이 내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내보낸 칼럼에도 나의 그런 마음을 실었었다.

‘이른 아침 눈을 뜨면 감사부터 나옵니다.
낯익은 것들이 그대로 눈에 들어오고, 지난 밤 함께 잠자리에 들었던 사랑하는 아내랑 눈을 뜨는 아침, 파아란 하늘은 창문 가득 넘치고, 여느 때 마냥 바깥에선 차 소리가 요란한 어제 같은 오늘, 나는 오늘도 생명 있는 사람으로 또 하루를 맞습니다.
아이들 방문을 사알짝 열면, 쌔근쌔근 잠들어 있는 그들의 얼굴에서 평화와 사랑과 감사를 읽고, 하루의 출발점에서 정성스레 마련된 아침상 앞에 앉으면 저절로 감사의 기도가 넘쳐납니다.
출근길 엘리베이터를 나서면서 문득 쳐다본 아파트 우리 집 12층 창가엔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아내가 있고, 나를 시작으로 하나 둘 일을 좇아 뿔뿔이 가족들이 흩어졌다가도 저녁이면 다시 돌아오는 집이 있다는 게 또 얼마나 가슴 뿌듯한 행복입니까.
매일 매일 나가 일 할 수 있는 일터가 있고,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건강이 있고, 일한 만큼 주어지는 보수가 있으니, 넘치진 않아도 큰 부족함이 없는 생활이 또한 복입니다.‘ (<평범한 것에 대한 감사> 중

이제 그 할머니가 가신지도 십수 년이 지났다. 그러나 늘 텅 빈 가슴으로 혼자만이 덩그마니 남겨졌다고 생각했던 그 때의 내게 외할머니의 존재는 특별한 의미였다. 이 세상에서 이토록 나를 사랑하는 큰 사랑이 있다는 든든한 백그라운드 내지 내 삶의 뿌리를 묻고 있을 땅, 고향 같은 존재로 그것은 세상이 온통 나만을 인정해 주는 것보다도 더 큰 든든함이요 행복이었다.
나는 지금도 내 삶의 순간순간에 내게로 모아지는 수많은 사랑을 느끼며 산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하기에 더 넘치도록 다가오던 사랑과 위로들, 나는 삶 속에서 진주를 캐듯 그것들을 하나하나 감사와 행복이란 이름으로 캐내어 필요한 만큼 삶을 충전하곤 했다. 그렇게 캐내고 가꾸고 함께 했던 아주 작은 행복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힘의 원천이다.
내 삶 속의 아주 작은 행복들, 나는 오늘도 그렇게 사는 법을 가꾸며 산다. 그것은 외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나만의 사랑법이요 행복 가꾸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