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뜬 눈으로 새운 카리브 해의 밤.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산 후안 관광 생각하며 가슴 설렜기 때문은 아니다. 항상 청춘 인양 생각하려던 나의 마음가짐도 ‘노년기의 신체 변화’앞에는 맥을 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침대에 등 붙이면 통나무가 되어 일고여덟 시간을 ‘잠자는 숲 속의 아저씨’였던 시절.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은 모자라 노인들의 새벽기상이 부러웠다. 다섯 시에만 일어나도 출근 전까지 세시간 정도는 글 쓰거나 책보거나 하고 싶은 공부 할 터인데— 그건 꿀 잠 잘 때의 부질없는 소망이었다.
나이 드니 잠의 질이 떨어진다. 꿀 잠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 지금은 토막 잠도 반갑다. 몸이 피곤해야 잠도 잘 오는 법. 운동 싫어하는 나의 게으름은 수면부족으로 응징된다. 그나마 여행 다니면 돌아다니지 않을 수 없어 쉬 피곤해지고, 그럴 때면 중간에 몇 번 깨지만 바로 잠들어 양호한 밤잠을 누린다. 이번 여행에도 그랬다.
크루즈 여행 첫째 날은 배 안 구석구석 다니느라, 둘째 날은 손바닥만한 하프문케이 섬 구석구석 다니느라, 셋째 날은 종일 항해 하는 배 안에서 탁구도 치고, 미니골프도 하고, 쇼 구경도 하고 늦게 잠들어서인지 잘 잤다. 문제는 넷째 날 세인트 토마스섬을 보고 온 후 너무 일찍 잠자리에 든 것이다. 잠 깬 것이 다섯째 날 밤 1시경이었다. 그 후 눈을 붙이지 못했다. 이유가 있었다.
다섯째 날의 산후안은 아침 7시 15분경 도착인데 볼 것 많다고 해서 정박지 관광 신청을 해 두었다. 관광 버스 출발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휴대폰의 알람을 5시에 맞추었는데, 제시간에 일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하다가 첫잠 깬 후 그만 꼬박 밤을 새우고 말았다.
비몽사몽. 서둘러 정박지 부두 앞 관광버스 출발선에서 줄을 선다. 우리 부부가 일착이다. 버스에 제일 먼저 타야 좋은 자리를 잡는다. 우리가 좋아하는 자리는 우측 첫 번째 열의 좌석. 창 밖을 볼 때 우측이 편하고 좌측에 있는 운전사가 시야를 가릴 염려도 없다. 게다가 오르내릴 때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그런데 산처럼 큰 백인 중년 남자가 슬금슬금 내 앞으로 다가온다. 간발의 차이로 내가 먼저였는데 내 옆에 서 있다가 슬쩍 앞으로 온다. 내가 먼저다 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괜히 관광분위기 망칠 것 같아 머뭇거렸다. 그랬더니 일행인듯한 중년 백인 여자가 당연한 듯이 백인 남자 앞에 선다. 수면부족에 대한 짜증과 겹쳐 그들의 행동이 나를 폭발직전으로 끌고 간다. 낌새를 알아채고 아내가 말린다. 영어 좀 한다고 자부하지만 본토영어를 구사하는 이들에게는 ‘옴메. 기죽어’가 뻔하다. 밴쿠버에서 예전에 무슨 일로 백인들과 따지다가 일방적으로 패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화가 나면 말 더듬는 것이 나의 습관인데 백인들은 화도 내지 않고 조용히 이야기 하는데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한다. ‘당신, 억울하면 경찰서 가서 이야기 하지?’라는 말 나오면 나는 그만 물러서야 한다.
버스 출발시간이 되어 관광가이드가 탑승신호를 보낸다. 그때 둘은 대열에서 벗어난다. 다음 버스를 기다린다나? 일행이 아직 배에서 내리지 않았단다. 아이고 고소하다. 우리는 개구리처럼 폴짝 중형관광버스에 튀어 오른다. ‘황금좌석’이 우리를 기다린다. 전리품인양 당연하게 앉는다.
푸에르토 리코가 무슨 뜻인지 아세요? 거의 중남미 원주민에 가까운 얼굴의 관광가이드 페르난도가 질문을 던진다. ‘부유한 항구’라고 내가 금방 대답을 하자, 그의 얼굴에 허망함이 약간 스쳐간다. 가이드보다 관광지를 더 잘 아는 관광객이 있으면 피곤한 법. 특히 여러 명이 타고 가는 버스 여행에서 아는 척 하는 관광객을 만나면 정말 피곤하다. 해서 여행 전 공부로 습득했던 지식은 잠시 접어 두기로 한다.
25인승 중소형 버스를 타고 맨 처음 도착한 곳은 국회의사당. 미리 예약된 시간에만 관람이 허용된다고 해서 맞은편의 미국 대통령 기념동상(President Monument)거리를 돌아보기로 했다. 1898년 스페인과 미국의 전쟁으로 미국이 승리한 후 푸에르토 리코는 미국 자치령이 되었다. 그 후 9명의 미 대통령이 산 후안을 방문했다. 2017년 10월 3일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이 열 번째다. 모두의 청동상이 실물크기로 제작되어 국회의사당 앞 리니어 공원 거리에 전시되어 있다.
1906년 시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이곳을 첫 방문한 이래 허버트 후버, 프랭클린 루즈벨트, 죤 에프 케네디, 버락 오바마,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이 행사축하 및 재해 위로 등 내용으로 공식방문을 했고, 휴가, 기금마련행사, 등 개인적 이유로 비공식 방문한 대통령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해리 트루만, 린든 죤슨, 제랄드 포드 였다.

이곳이 관광명소의 하나인지 몇 대의 관광버스가 정차한다. 혼잡을 피하기 위해 교통경찰이 10여분 정도의 정차를 허락한다. 사람들은 우르르 내려서 각자 좋아하는 대통령 앞에서 증명사진(?) 찍느라 난리다. 케네디와 오바마 대통령이 제일 인기다. 아내는 잘 생긴 케네디 대통령, 나는 흑백혼혈로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대통령이 된 오바마 대통령 앞에서 포즈를 취한다. 여기서도 트럼프는 별 인기가 없다. 대통령이던 평민이던 사람은 마음보를 곱게 쓸 일이다.
국회의사당 방문허가가 떨어졌다면서 페르난도가 일행을 인솔했다. 다른 관광버스 손님들과 섞이지 않게 자기 오른손만 쳐다 보며 따라오라고 한다. 번쩍 치켜든 손을 따라가는 관광객들. 영락없는 초등학생 모습이다. 소풍 길에 행여 선생님 잊어버릴까 조바심하는.
돔형 지붕이 있는 대리석 국회의사당 앞에는 미국기와 푸에르토리코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건물 뒤편으로는 카리브해가 펼쳐져 있어서 국회의원들이 복잡한 국사를 논의하다가 가끔 옥빛 바다를 보면서 휴식을 취할 수도 있겠다. 관람순서를 기다린 후 보안검색대를 통과하고 들어간 의사당. 원형지붕 내부에 프레스코 형태의 아름다운 벽화가 보인다. 중앙의 원형벽화에는 여덟 명의 여신이 보인다. 각각 과학, 건강, 정의, 자유, 교육, 농업, 예술과 문화 분야 등을 관장한다.
그 밖에도 메인 홀 주변을 치장한 벽화에는 정치인, 법률가, 과학자, 참전용사 등 푸에르토리코를 빛낸 사람들의 모습과 주요 역사를 보여주는 그림들이 있고, 중앙에는 푸에르토리코 헌법을 각인한 조형물이 자리잡고 있다. 함부로 헌법을 건드리지 말라는 뜻인지 가장자리에 사슬모양의 방어대가 놓여져 있다.
의사당 건물관광은 그뿐이었다. 수려한 2층계단으로는 올라가지 못한다. 의원들의 토론장면도 보기를 기대했는데 무리였다. 막말하고 삿대질하는 한국 국회의 정경과 비교해서 어떻게 진행될까? 궁금했었다. 예전 오타와 국회의사당과 빅토리아 주정부의사당을 봤으니 미루어 짐작할 수 밖에. 캐나다도 법안처리과정에서 찬반이 엇갈리면 다소 격양된 어조로 토론이 진행되지만 육탄공격(?) 회의는 없다. 그래서 선진의회 소리를 듣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