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정목일

 

덕유산에서 두 해 겨울을 보낸 적이 있었다.
덕유산의 눈은 한 번 내리기만 하면, 숲처럼 내렸다. 산봉우리와 산봉우리가 어깨를 짜고 길게 뻗은 산맥 위에 호호탕탕히 쏟아졌다. 원시림처럼 무성히 내렸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두 손을 모우고 모두 고개를 숙였다. 아무도 항거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고 독야청청 하는 나무가 있을 리 없었다.
산들도 고즈넉이 눈을 감았다. 함박눈은 실로 무서운 정복자였다. 산이고 들이고 마을이고 순식간에, 모든 것을 남김없이 차지해 버렸다. 요란한 승리의 군화소리도, 펄럭이는 깃발도 없이, 모든 것을 정복해 버렸다.
아무도 함부로 손댈 수 없이 신성해 보이던 덕유산 봉우리도, 변함없이 졸졸거리던 개울도, 울울창창한 침엽수림도 모두 무릎을 꿇었다. 정복자들은 칼을 차지도 않았다. 승리의 함성도 군악도 없었다. 그들의 행렬은 말할 수 없이 정숙하였고, 그 모습에서는 성스러움이 가득 넘치고 있었다.
모두 둠을 죽이고,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모습은, 악대를 앞세우고 많은 신하를 거느린 황제의 모습이 아닌, 순결하고 다정한 눈빛을 지닌 성자의 모습이었다. 그들의 표정은 아주 범속을 떠난 것 같은 신령스러움이 맑게 은은히 넘쳐흘렀다. 그들을 말없이 바라보던 백성들의 마음도 어느 새 신비롭게 까닭모를 맑은 감동에 젖어듬을 느꼈다.
여태까지 여타의 힘으로부터 구속되고 속박받기를 거절하여, 처절한 저항을 보여 왔던 무리들도, 오히려 은근히 지배를 당하고 싶어, 알몸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그 위에 정복자들은 마치 꽃송이처럼 거룩하게 내려, 이유 없이 온 누리를 덮어 버렸다. 고요한 혁명이었다.
무혈의 혁명이 아니라, 순백의 혁명이었다. 그들의 영토는 여인의 속살보다 더 희고 부드러운 선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초야에서 옷 벗는 신부의 나신(裸身)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 어느 누구도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지도 못하리라. 정복자는 새 헌법을 선포하고 일시에 공화국을 소리 없이 개혁해 버렸다.
그들의 정복과 혁명은 기적이었다. 어떻게 단번에 말없이 모든 것을 하나의 순백으로 개혁해 버리는지 신기한 일이었다. 그들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교통과 통신을 단절시키고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시켰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대해, 조용히 자신을 성찰하고 좀 정숙하라고 촉구하였다. 변명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했다. 여태까지의 모든 잘못은 묻지 않고 깨끗이 묻어 버리겠다고 했다.
정복자들은 과연 위대한 힘을 지녔다. 정복자들의 몸에서는 피비린내가 나는 것이었으나, 그들의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티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하였다. 공정하고 지극히 평등했다. 정복자의 강력한 선정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갑자기 고요해지고 순결했다. 그들이 백성들에게 원하는 건 외부의 껍데기가 아니라, 내부의 알맹이, 그것이었다.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순수와 진실만이 모든 것에 통하는 새 헌법이 어느 덧 시행돼 있었다. 정복자들의 통치는 온후하고 선량했다.
그들은 형식적으로 엄격히 자유를 통제하였으나, 정신적으로는 무한한 자유와 낭만을 부여했다.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우선 정복자의 미에 감동하여, 도저히 반역을 일으킬 마음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백성들이 꿈꾸어 오고, 갈구해 오던 공화국이 아닌지 모를 일이었다.
덕유산 산골 마을은 태곳적 원시의 정적과 평화로움에 잠겨버렸다. 눈 속에 파묻힌 초가집에서 아이들의 환희에 찬 음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농사지어 놓고 새끼나 꼬며 지내던 산골 사람들, 하나, 둘…… 사랑방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눈도 왜 이렇게 지독히도 많이 온담……’
넉넉히 지펴 넣은 군불에 방안은 안온하고 궁둥이가 뜨끈뜨끈 하였다. 함지박에 내어온 김이 오르는 고구마가 먹음직스럽고 동 김치 무 한 조각을 잘근 씹는 맛이 새큼했다. 투박스러운 구수한 이야기가 담배 연기처럼 모락모락 퍼져 올랐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눈이 끝나고 나면 토끼 사냥을 가야겠다는 이야기에 군침이 돌았다. 모두가 다 진뜩진뜩 찰진 이야기를 그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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