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30연대에서 신병교육을 받았는데, 속내의 고무줄 넣는 곳에 숨겨온 돈으로 매점에서 빵을 사먹곤 했다. 한참 기운이 왕성한 나이에 고된 훈련을 하니 훈련병의 배는 항상 꺼져 있는 법. 가끔 빵을 사서 넓적한 바지주머니에 넣고, 야간보초 설 때 한 입 베어먹는 맛이 꿀맛이었다. 어느 날 밤 2시 보초를 서며 역시 주머니에서 빵을 꺼냈는데 누군가 뜯어먹은 흔적이 있는 게 아닌가? 화적 같이 생겨먹은 왼쪽침상의 훈련병인가 아니면 기생 오라비처럼 생긴 오른쪽 동료인가 생각해 보니 쥐 이빨 흔적이다. 그제서야 내무반을 찍찍거리며 돌아다니던 서생원들이 떠올랐다. 바지주머니 바깥을 뜯어낸 흔적이 틀림없는 놈들의 소행이다. 쥐 이빨 자국이 있는 부분의 반대편부터 살금살금 먹다가 나머지는 버렸다. 혹 쥐가 전염병균이라고 보유하고 있다면 큰 낭패지 싶어서였다.
훈련소 쥐도 얼마나 먹을 게 없으면 죽기살기를 각오하고 바지주머니를 뚫었을까. 병영에 있는 것은 미물이나 사람이나 모두 배가 고픈 법. 산 펠리페 성 부엌을 보니 취사병이 요리하는 곳에서 군침 흘리며 바라보고 있을 병사들이 생각난다.
크루즈 출항시간도 되어 가고, 1월인데도 섭씨 34도를 오르내리는 돌담성에서 이곳 저곳 천천히 세심하게 들러 보는 것은 무리다. 바다로뿐 아니라 섬 다른 편 육지로부터 침략할 수 있는 적을 감시하는 파수대가 있는 여섯 번째 구역을 돌아보고는 서둘러 성채를 나온다. 천천히 안내팻말을 읽어가면서 유적지를 돌아보는 여유가 잘못하다가는 출항시간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해서 빠른 걸음으로 다니니 등줄기에 후줄근 땀이 베인다. 해풍이 식혀주지만 초조한 마음에 타는 속은 식힐 수 없다. 다음에 또 한번 오지 뭐. 그때는 푸에르토 리코에만 머물면서 산 후안 구 시가지를 샅샅이 흩어야지. 자위하면서 펠리페 성을 나온다.
서둘러 크루즈 정박지 쪽으로 내려 가는데 오른 쪽에 절에 있는 사리탑 같은 조형물이 보인다. 가까이 가 보니 안내팻말이 있다. 1625년 네덜란드가 산후안을 침공했을 때 전투에서 사망한 시민들과 스페인 병사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탑이다. 이 작은 섬을 차지하기 위해 한달 이상이 걸린 네덜란드 군의 공격은 집요했고, 심지어 거의 점령할 뻔 했다. 네덜란드 군은 도시를 불태우고 건물을 파괴하였으나 시민 군까지 가세한 스페인군대를 결국 꺾지 못하고 물러갔다. 과거 피지배자였던 원주민까지 합세한 전투는 공동의 안녕을 위해서는 적이었던 사람들과도 힘을 합쳐야 한다는 교훈을 가져다 준다.
다시 길을 재촉하는데 왼쪽에 붉은 색 돔형 지붕이 있는 건물이 눈에 띈다. 산타 마리아 막달레나 묘지(Saint Maria Magdalena de Pazzi Cemetery) 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을 빌렸는가 했는데 아니기도 하고 맞기도 하다. 12세기 가르멜 산에서 설립된 가톨릭 수도회인 가르멜회의 수녀였으며 로마교황청에 의해 성녀로 추대된 이탈리아 파지(Pazzi)가문의 막달라 마리아를 기리기 위해 묘지명을 정했다. 그러나 그녀의 종교명은 신약성경의 마리아로부터 왔다.
그녀가 누군가 궁금해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1566년 4월 이태리 플로렌스의 한 부유하고 명망 높은 귀족가문에서 루크레찌아(Lucrezia)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여인이었다. 그러나 주로 카타리나라는 세례명으로 불리었고, 열 살에 첫 영성체를 받아 들이면서 평생 순결을 지키겠다는 서약을 했다. 열두 살에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무아의 경지에 빠져 성령과 만나는 체험을 했으며, 이후로도 자주 성령과 교감하는 경험을 했다. 열네 살에 말타의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젊은 귀족의 청혼을 받았으나 순결서약을 지키겠다며 플로렌스의 가르멜 회 수녀원에 예비수녀로 들어갔다. 3년후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종교 명을 받고 정식 수녀가 되었다.
신비로운 것은 수녀원에서 영성체 의식을 할 때 마다 무아지경에 빠져 성령을 본다는 것이었다. 두 시간 동안 성령과 교감하는 일이 40여일 계속되는 일도 있었다. 그녀는 몸이 허약해서 병이 떠나지 않았으나 항상 기도로 이겨 내었다. 때로는 죽음이 가까워올 정도로 고통을 받았으나 그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을 생각하면 나의 고통은 오히려 평안하고 감미롭다’고 할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 성령을 통해 그녀가 사람들을 치유하며 때로는 예언도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예컨대 레오6세 교황의 즉위를 예언했으며, 아주 먼 지역에서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마흔 한 살 나이에 사망했지만, 여전히 그녀가 현현하여 병자들을 치유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래서 산후안 공동묘지를 건립할 때 망자들을 위로하고 보호해 달라는 뜻으로 그녀의 이름을 묘지명으로 채택한 듯 하다.
1863년 스페인 식민지하에서 건설된 이 묘지는 푸에르토리코출신 유명인사들의 묘소가 주류를 이룬다. 약 1,000여기가 있는 묘지에는 정치가, 예술가, 법률가, 사업가, 스포츠맨 등 명망 있는 사람들이 묻혔다. 내가 알만한 사람이라고는 영화배우 호세 페레르(Jose Ferrer). 1950년 내가 태어나고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시라노 드 벨주락’이라는 작품으로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받았다. 최초의 푸에르토리코 사람이며 최초의 히스패닉어를 쓰는 수상자였다. 영화광인 나도 그가 출연한 영화를 본 기억이 없지만, 피터 오툴이 나오는 아라비아의 로렌스 (1962년작)에서 중요한 역할로 까메오 출연했다니 다시 한 번 그 영화를 눈 여겨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동 묘지는 푸에르토리코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선으로 신앙의 중심지로 여겨진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던 산 펠리페 요새가 좌측에 있는 가 하면, 새로운 삶이 오가는 카리브해를 전면에 두고 있어서일 것이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요단강이 기독교에 있고, 레테의 강이 그리스신화에 있듯이, 카리브해의 물길도 망자를 실어 저 세상으로 보내는 역할을 하는 지도 모른다.
마음 같아서는 푸에르토 리코 유명인사들의 묘지를 하나하나 살펴보고 그들의 업적을 기려보고 싶었다. 허나 서서히 땅거미지는 산 펠리페와 막달레나 묘지를 뒤로 하고 발길 서두른다. 선착장 가는 택시 운전사는 전형적인 카리브해의 미인. “산후안 관광하신 느낌이 어땠나요?”하는 의례적인 질문에 “좋았어요. 다시 한 번 오고 싶어요”하는 의례적인 대답을 한다. 그러나 어슴푸레 여운이 남는다. 무언지 모를 아쉬움이 나를 잡아 당긴다. 시간이 있었다면 산후안에 있다는 푸에르코 리코 한인회를 찾아가 여기까지 흘러온 그들의 이야기도 들어 보고 싶었고, 보통사람들의 평범하지만 행복한 생활도 엿보고 싶었다. 타국을 여행할 때 흥미를 끄는 것은 오랜 세월을 견뎌온 문화유산이나 풍습, 그리고 간난한 삶의 흔적이다. 크루즈 정박지 관광으로 몇 시간 훑어 보는 것은 그야말로 주마간산. 사는 게 다 그렇지. 내 사는 세상도 다 둘러보지 못하고 가는 게 인생인데. 체념하고 뒤로 하는 산후안 거리. 낙조가 뉘엿뉘엿 섬을 휘감는다. 산 펠리페 성 파수대가 무심한 표정으로 이방인을 전송한다. 카리브해 갈매기들도 맞장구를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