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도화초도 암수가 있어야 열매를 맺는데 그 간단한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물론 암수가 함께 있는 자웅동체의 아메바 같은 고등동물 이나 고등식물이 아닌 것도 많지만 우리가 아는 고등동물과 고등식물엔 암수가 구별되어 사랑을 하지않으면 종족을 번식 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물론 개나리, 민트, 로즈마리 같은 것은 가지를 꺾어서 땅에 심어두면 뿌리가 나서 종족번식이 이루어지는 것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한때 성교육으로 유명한 분이 계셨다. 그때는 그분의 성교육을 보면서 너무 적나라한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이젠 알 것 같다. 우리들이 교육 받은 성교육이 잘못되어서 그렇게 느낀 것이다. 그 잘 못 주입된 성교육이 결과적으로 우리의 지식에 뿌리깊이 박혀서 우리의 자녀들을 기를 때도 영향을 준 것은 아닌지하는 생각이 든다. 나만 그런건지는 몰라도 (많이 그렇게 듣고 큰 것으로 안다)
내가 어릴때 부모님들은 나를 어떻게 낳았느냐는 질문에 어린 놈이 뭘 그런걸 물어봐. 몰라 임마 공부나 해. 아니면 대화의 화제를 딴 것으로 돌렸다. 그러다 대답해 준 말이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했다. 그래서 그 다리에 가서 하염없이 기다린 적도 있다. 혹시나 날 낳아서 버린 진짜 부모님을 만날 수 있을까하고 말이다. 좀 심하게 말하거나 매질을 하면 진짜 나를 낳은 엄마가 아니라서 그런 건 아닐까하는 생각조차 했다. 왜냐하면 부모님과 나는 나이 차이가 많다. 누나와 나이 차이가 11년이나 난다. 그래서 엄마 등에 업힌 기억은 없고 누나 등에 업힌 기억만 있다. 주민등록상 아버지는 1922년생으로 되어있었고 어머니는 27년생으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7살차이가 나셨다. 아버지가 22살이던 해에 어머니가 결혼하셨다니까 15살이 아닌가 유추가 된다. 장터마다 떠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던 외가집의 외할머니가 아버지에게 그냥 어머니를 치웠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일본 고오베에 징용으로 끌려가신 것을 술만 취하면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다. 태어나서 외국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 본 징용에서 아버지는 살아서 돌아왔다. 그것도 일본여자가 같이 살자고 했는데 뿌리치고 왔다는 스토리까지 마음에 담아서 말이다. 징용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말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어머니가 대신 말해주었으니까?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시집을 간 제천군 한수면 덕곡리의 시댁엔 시동생과 시누이 둘이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고 방엔 멍석도 아닌 짚을 깔고 살았다고 했다. 어머니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사는게 아니고 짐승들 마굿간에 짚을 넣주면 잠자리 하듯 그렇게 살았다고 했다. 처음엔 그곳에 도저히 살수없어 따로 동네에 방을 얻어서 살았다고 했다. 소위 신혼이니 당연히 바글바글한 시댁이 싫었을 수도 있겠겠다 싶다가도 그 어린나이에 그런 생각까지 했을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자녀를 낳고 키울때마다 3살 정도되면 죽고 죽고를 반복해서 10명 중에 7명을 잃은 어머니는 어릴적 산에 나무하러 가면 저 쪽에도 니 형이 있고 이 쪽에서 니 형이 있다고 했다. 난 보지도 못한 형들에 대한 감정이 없었지만 어머닌 마음이 찢어졌으리라.
현대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 화장지, 신문, TV, 냉장고, 컴퓨터, 핸드폰의 혜택을 받지 못한 부모님에겐 성교육이란 사치였는지도 모른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그런 걸 알아서 뭐하냐는 생각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거 몰라도 공부만 잘하면 돼. 내가 공부를 못해서 출세를 못했으니 너희들은 공부를 잘 해 출세하라는 거였다. 그리고 대표적인게 눈에 보이는 면서기나 철도공무원으로 동네에서 안정적으로 생활하는 가정이었는지 모른다.
사람도 사랑을 할 때 천국을 맛 본다고 한다. 동물들도 그런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꽃들이 사랑을 하는 꽃피는 동산은 그 곳이 천국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한다. 에덴동산을 그릴 때 꽃동산으로 그리고 천국을 그릴때 꽃이 만발한 것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면 사랑하는 순간이 바로 천국이 아니겠는가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