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캐나다에서 한국운전 면허를 바꿔 주지만 우리가 이민 오던 30여년 전엔 한국에서 운전을 했던지 나처럼 한 번도 운전을 하지 않았던지 같은 조건으로 시험을 다시 봐야 했다.
이민오기전 한국에서 인천 가좌동에서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까지 출퇴근을 하면서 차를 운전하지 못했다. 아니 운전면허가 없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지옥철을 견뎌내면서 살아야 했다.푸시맨이 있던 그 시절이 코로나 시국인 지금과 연동해서 생각하면 끔직한 일이지만 그래도 30여년 전의 그 지옥철을 생각하면 이젠 추억이라 악몽이라기보단 추억으로 남아 있다.흔히 말하는 장롱면허도 없이 캐나다에 이민와서 보니 차없이 다닌다는 것이 얼마나 무로한 일인지 몸소 깨닫게 된다. 당시엔 스카이 트레인이 밴쿠버에서 써리가는 엑스포라인 하나 밖에 없었다. 리치몬드에서 밴쿠버 브로드웨이까지 출퇴근을 하게된 이민초기에 길에서 2시간을 허비하고 출근하고 퇴근도 비슷하게 하다보니 하루에 직장에서 12시간에 길에서 4시간. 초 죽음이 되어 있어야 했다. 무엇보다 버스를 기다리는 일은 정말이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갈아 타야 하는데 보통 한국에선 버스 스케줄이 갈아 타는 것까지 계산 되어서 버스가 토착하고 바로 다음 버스가 연계 되지만 30분에서 한 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보통이었다.
특별히 다운타운에서 행사라도 있는 날은 브로드웨이에서 리치몬드 오는 버스를 타는 것이 정말이지 힘든 일이었다.고등학교 통학때처럼 버스가 꽉차서 그냥 지나간다. 그게 한 대 두 대 늘어 나다보면 차라리 걸어 갈걸 하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운전면허 시험을 봤다. 물론 이론 시험이다. 결과는 참담하게 불합격. 그 다음 시험엔 사전을 찾아 가면서 해도 된다고 해서 영한사전을 가져갔지만 포기했다. 뒤에 기다리는 사람도 많은데 사전을 뒤적이면서 시험을 본다는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이었다.
돈도 돈이고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통역을 써서 시험을 봤다.그렇게 이론을 합격하고 실기 시험을 보는데 시간당 30불로 당시 미니엄 웨이지가 6불인가 할때이니 엄청난 거금을 들여 실기시험을 위한 도로주행 연수를 했다. 아니 처음엔 운전대를 한 번도 잡아 본적이 없는 나를 위해 랜스다운 주차장에서 시동을 켜고 앞으로 전진, 뒤로 후진 좌회전, 우회전 등 기본적인 것을 가르키는 것부터 시작해서 도로에 나가게 되었다. 도로에 운전연습이란 표지와 운전학교표지판을 앞과 옆에 붙이고 도로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다른 차들의 밥이 되었다. 경적을 울리는 것은 양반. 욕을 하고 가는 운전자도 많았다. 왜냐하면 운전선생도 중국인이나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운전 배울때는 한국인한테 배웠다. 그런데 운전을 잘 한다고 칭찬하던 그의 말과는 다르게 보기 좋게 떨어졌다.
그는 운전시험감독관이 나오면 인사하고 문을 열어 줄 것과 차를 바로 출발할 수 있게 앞쪽으로 주차를 할 것 등을 주문했다. 하지만 시험을 본다고 생각을 하니 덜덜 떨렸다.당연한 결과이지만 ICBC를 나서자 마자 감독관이 너 위험운전 불합격을 외쳤다. 연습할 땐 늘 우회전을 하던 그곳에서 감독관이 좌회전을 요구했고 양쪽을 확인하고 돈다고 돌았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웠던 것이다.
그렇게 어이 없이 떨어지고 리치몬드는 까다롭다고 랭리에 가서 시험을 보면 좀 더 쉬울거라고해서 랭리에 가서 시험을 보는데 구시가지라 구불구불한 길과 수많은 거리제한 등 결국 길이 익숙치 않아 생긴 위험운전으로 또 불합격.
그 다음엔 중국인 선생과 운전연습을 했는데 연습 중에 얼마나 잔소리가 심한지. 속에서 욕이 절로 나왔다. 한국 운전선생은 잘한다고 했는데 중국인 교사에게 다시 운전을 배우는 것 같았다. 우회전 시그널, 밀러, 슐더 체크의 공식과 더불어 고개를 더 팍 돌려서 시험관에게 내가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는 것을 보여주라고 계속 잔소리를 했다. 또는 행인이 있는데 우회전을 했다고 위험운전이라고 또 잔소리.좌회전도 차가 오는데 좌회전을 했다고 위험운전, 찬스가 있는데 왜 기다리고 있냐고 또 잔소리 물론 뒤에 차가 빵빵거린 것은 당연하다.
그렇게 시간당 30불의 운전연습은 계속 되었고 당연하게도 불합격은 계속되었다. 운전면허가 있어야 가족들과 가고 싶은 곳도 가고 출퇴근에서 좀 더 쉬워진다고 생각하니 꼭 합격해야한다는 생각이 들고 먹고 살기위해 꼭 따야 한다는 의무감도 들었다. 아니 애초부터 운전을 한 번도 안해본 사람이 도로에 바로 뛰어 들어서 운전연습을 한다는게 말이 안되는 것이기도 했다. 수없이 떨어지다 보니 운전시험을 보면서 연습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중국인들은 중국인 감독관에게 돈을 주고 운전면허를 딴다는 말도 돌았다. 나중에서 발각되어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는 것이 증명되기도 했다. 연습을 많이 하니 조금씩 자신감이 붙었지만 시험볼때 마다 연습과는 다르게 긴장을 한 탓에 제 실력을 발휘 못 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페러럴 파킹이 가장 문제였다. 길가에 주차된 차와 나란하게 차를 세우고 후진하면서 45도로 틀고 운전대를 풀면서 들어 간다. 물론 옆차도 주시하고 뒷차도 주시한다. 요즘은 후방카메라가 있어서 화면만 보면서 주차하는 사람도 있지만 시험볼땐 당연히 후진이면 후방을 주시해야한다. 더불어 앞쪽과 옆쪽도 보면서… 그렇게 어렵게 운전시험을 합격했다. 아들에게 내게 배운 그 운전선생을 소개해서 아들도 그 운전학원 중국선생한테 운전을 배웠는데 몇 번의 불합격과 운전학원 선생의 잔소리에 진절머리를 내던 아들은 운전면허시험을 지금은 포기한 상태다.
딸과 아내는 나보다는 쉽게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주로 내가 운전을 하니 아내는 기회가 적다. 딸은 운전면허 딸때만 운전을 해서 지금은 거의 장롱면허 수준이다. 같이 운전면허를 딴 친구는 지금 차로 출퇴근을 한다. 운전면허시험을 볼땐 면허만 따면 정말 맘대로 운전하고 다닐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정작 면허를 따고 생에 처음 차로 중고차를 구입하고 나서 차를 샀으니 끌고 가라는 딜러말에 쇼킹했었다. 노스밴쿠버에서 리치몬드까지 어찌 왔는지 꿈속을 헤메는 것만 같았다. 옆에 누가 있다면 든든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전선생이 늘 옆에 있다가 혼자 운전을 한다는 것은 걸음마 하던 아이가 혼자 걷는 것과 같았다.
운전을 시작하고 2년경과후 대형사고가 있고 허리를 다쳐서 고생을 했다. 물론 작은 접촉사고도 있었고 도로는 늘 정글 같은 곳이다.어떤 목사님이 운전을 하면서 욕을 하니 옆에 있던 신도가 목사님이 그렇게 욕을 해도 되냐고 하니 목사님 왈 내가 지금 목사입니까? 운전수지했다는 말처럼 운전대를 잡으면 사람을 조급하게 만들고 여유를 사라지게 해서 입을 거칠게 만든다. 게다가 거리를 두고 운전할수록 끼어드는 차들이 많아 더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고는 한다. 지금 하루 70키로의 왕복 출퇴근 길을 날마다 운전한다. 스카이 트레인을 타고 창밖을 보고 사색을 하면 여유롭게 출퇴근하고 싶다. 아니면 걸어서 30분정도의 거리를 출퇴근하면 정말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