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농암 김중위
 
권력에게는 언제나 주인이 있다. 주인 없는 권력은 없다. 권력은 야생마와 같다. 주인에 의해 길 드려 진대로 움직인다. 주인이 어떻게 부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알렉산더는 어렸을 때 이미 미친듯이 날뛰는 말을 조용하게 만든 적이 있다. 말(馬)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금방 알아차린 것이다. 이처럼 주인이 말의 성질을 알아차리고 다루면 명마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용열한 말이 되는 것처럼 권력 또한 같다. 권력을 잘 다루면 대중으로부터 숭앙의 박수가 터져 나오고 그렇지 못하면 증오의 눈초리가 이마를 찌른다.
 
권력의 주인은 말의 조련사처럼 권력의 조련사가 되어야 한다. 권력의 성격과 기호를 잘 알아 그와 호흡을 잘 맞춰야 한다. 권력이 힘을 잃으면 주인도 힘이 빠진다. 권력이 실수를 하면 주인은 낙마(落馬)한다. 그러기에 권력의 고삐를 그 권력의 성정에 맞게 잡고 있어야 한다. 너무 단단히 잡아도 권력이 힘들어 하고 너무 느슨하게 잡으면 권력이 빠져나간다. 권력은 기회만 있으면 주인곁을 빠져 나가려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언제나 감시감독을 철저히 해야 한다.
 
권력이 주인을 무시하면 교만해 진다. 그러기에 주인은 권력에게 무시당하지 말아야 한다. 권력 앞에서 언제나 품위를 유지해야하고 사소한 실수라도 하지 않아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권력이 잠든 주인을 등에 업고 김유신의 애마처럼 주인이 평소 하던 습관대로 행보를 한다. 권력이 무심코 저지른 실수를 하고 난 뒤에는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그만큼 주인은 상처받을 수밖에 없다. 주인이 부패하면 권력은 한술 더 뜬다. 눈치 보지 않고 부패한다. 그만큼 권력은 눈치가 빠르다. 주인이 힘이 빠지면 권력은 일순간에 도망간다. 눈치가 빨라서다.
 
권력과 주인은 일심동체와 같은 존재로 서로가 인식하여야 한다. 가족처럼 서로를 사랑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살아가는 관계여야 한다. 어느 한순간이라도 어느 한쪽이 불신하는 감정이 싹튼다면 그건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권력을 너무 믿어도 안된다. 권력은 배신의 명수다. 권력을 믿고 과도하게 힘을 발휘하면 권력은 주인에게 뒷발질 한다. 권력에 너무 의존하지 말라! 이 또한 권력에 배신당했을 때에 회복할 수 없는 불행을 맛보게 된다.
 
우리는 모두 다모클레스의 칼(A Sword of Damocles)이라는 말(言)이 잉태하고 있는 의미를 알고 있다. 권력은 언제나 한가닥 말총에 매달려 주인의 머리위에 걸려있다는 사실을! 주인도 어쩌지 못하고 그 말총 끝에 매달려 있는 칼에 소름끼치며 하루해를 삼켜야 한다. 잠자리에 들 때에야 비로소 편안한 휴식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즈음에는 말총에 매달린 그 칼도 역시 휴식으로 들어간다.
 
권력을 너무 살찌우지 말라. 권력이 살찌면 그림자도 살찐다. 살찐 말은 달리지를 못한다. 달리지 못하는 말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야윈 권력만도 못하다. 사무사(思無邪)! 그것은 잘 달리는 말을 두고 하는 상찬(賞讚)이었다. 잘 달리는 말이 천리를 간다. 권력이 살찌면 행동이 굼뜨고 생각이 미련해 진다. 노마지지(老馬之智)라는 말이 있다. 늙은 말이 지혜롭다는 뜻이다. 안개 낀 벌판이나 눈덮인 산야에서 길을 잃었을 때에는 늙은 말에 의지하여 길을 찾아 가라. 늙은 말은 백전 노장이다. 권력이 길을 찾아 줄 것이다.
 
그러기에 경험 많은 권력 앞에서는 자신의 권력을 함부로 자랑하지 말라. 권력에도 작은 것과 큰 것이 있다. 똑같은 권력이라고 함부로 대들지도 말라. 권력은 게임이기 때문이다. 자칫 하면 이기고도 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백전노장의 권력은 이기고도 지는 척 할뿐 의기양양해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이기고도 지는 척 할 줄 아는 권력이 참으로 장대한 권력이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를 염두에 두면서 패자에게 불명예의 모욕감을 안겨 줘서는 안된다. 포위된 적에게는 항상 퇴로를 열어주라는 병법은 만고의 진리다. 막다른 골목으로 쫓긴 쥐는 고양이도 물려고 대드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 스스로 패자임을 자인할 때 까지 기다리면서 내심으로는 승리를 자축하는 여유를 보여라. 게임은 일회전으로 끝나는 경우보다는 장기적인 경우가 더 많아서다.
 
무엇이 그리도 급한가? 가지고 싶다면 먼저 도와주라고 노자는 말하고 있지 않은가? 상대가 왕성하도록 성심껏 도와준다면 언제인가는 그 권력이 자신의 것으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에는 언제나 주인이 있게 마련이지만 그 주인은 언제나 바뀐다는 사실도 변함없는 진리다.
 
고은 (高銀)시인은 이런 짧은 시를 쓴 적이 있다. “올라 갈 때 못 본 꽃/내려올 때 보았네.” 이 시가 주는 의미는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시를 사람으로 바꿔 놓고 보면 여간 심오하지 않다. “올라 갈 때 못 본 사람/ 내려올 때 보았네”라고 고쳐보자. 사뭇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의미 내용이 하늘과 땅차이다. 권력을 쥐고 있을 때나 권력으로 줄달음처서 올라갈 때에는 보이지 않던 사람이 권력을 내려놓고 나면 보인다는 뜻이다.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그러니 권력을 쥐었을 때에 뭇사람들에게 잘하라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교만하지 말라는 말이다. 평생 가진 권력을 누릴 것 같지만 세상천지에 눈을 씻고 봐도 그런 사람은 없다.
 
권력의 게임에서 세 불리하다 싶으면 재빨리 항복하는 것이 이기는 길이다. 싸워서 지는 것 보다는 백배나 잘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항복의 전술이다. 바람이 불면 갈대는 몸을 숙인다. 오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일도 있고 또 그 내일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에 싸워 지는 것보다는 훨씬 더 지혜로운 전략이다. 도망가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는 죽음을 자초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항복했을 때에는 항복을 얻은 상대는 만족하면서 스스로 무장해제를 하게 된다. 최후의 승리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다. 술을 잘 못하는 사람에게 술을 권하면 한 잔의 술을 잃는 것이요 술을 잘하는 사람에게 술을 권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잃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사람에 따라 합당하게 대우하라는 뜻이다. 한비자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다. “명예욕에 들떠 있는 사람에게 이익을 말하면 속물이라 경원할 것이요, 이익에 몰두 하고 있는 사람에게 명예를 말하면 세상물정 모르는 천치라고 부를 것이다” 라고.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은 사람 볼 줄을 알아야 한다. 어떤 예우를 하는 것이 합당한지를 가늠할 줄 알아야 한다. 과장 깜을 장관직에 앉히거나 내시같은 사람을 측근으로 두는 아둔함으로는 권력이 제 색깔을 낼 수 없다.
 
권력이 권력으로서 제 빛깔을 내려면 관맹상제(寬猛相濟)해야 한다. 너그러움으로 엄격함을 억누르고 엄격함을 너그러움으로 덮어주는 아량과 지혜가 있어야 한다. 이런 주장은 동양적인 것이다. 최고 권력자에게 “사자와 같은 용맹과 여우와 같은 지혜”를 요구한 마키아벨리의 지론은 서양적인 것이다. 신기하게도 권력이 갖추어야할 덕목으로 꼽고 있는 것에서도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 권력을 혹사시키지 말라는 경고다.
 
#(이 글은 권력을 쥐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바치는 헌사다. 갑질하는 사람은 모두가 권력자다. 머리에 띠를 두르고 삿대질 하는 사람도 권력자다. 갑질과 삿대질에 숨이 막힌다.) 문인칼럼_농암 김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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