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비가 많이 오고 춥더니 9월은 산불이 많이 일어나고 건조하며 예년과 달리 비가 오지 않는 날이 많다. 여기 40년을 살아도 처음 보는 날씨다. 해가 붉게 먼지 자욱한 하늘 사이를 뚫고 얼굴을 내민다.
요즘 사람들이 허리가 많이 아픈 것은 오래 살아서라는 의사의 말에 공감하면서 나는 얼마나 더 살고 얼마나 더 살고 싶은지를 생각해본다.
남들처럼 살기가 싫고 남들처럼 행동하기 싫어하는 성격이지만 남들과 똑같은 말이 저절로 입 밖으로 새어나온다. 나도 별수 없구나하면서 남과의 차별화에 좀 더 무뎌진다.
내가 남과 같이 살기 싫다는 것은 내가 우월해서거나 혹은 그런 생각으로 시작된 건 아니었다. 어떤 일이든 자신의 주관대로 행동하고 싶어 하는 국외자적인 반항기질 때문일 것이다.
경쟁을 하더라도 승산이 없으면 경쟁 자체를 포기하는, 완벽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거나 게으름의 소치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이만큼 살고 여기 서서 생각해보니 어릴 때도, 더 나이를 먹고 중년, 장년이 되었을 때와 별로 다르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꽤 성공적으로 살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것이 보편적인 기준이 있다고 보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나 자신을 다독이며 “이만하면 남에게 큰 민폐가 되는 것도 아닌 것 같으니 잘 산거야.” 하면서 위안을 삼기는 한다. 이것도 보편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니 나 자신의 커트라인을 낮추면 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사람의 일생을 보통 80년 정도로 보고 있다. 여러 가지 환경이 그것을 받침 하도록 변한 덕분에 큰 무리 없이 이 생각을 고치지 않고 가지고 산다. 그렇다면 나도 거의 인생의 종착역에 다 와 가는 셈이다. 이보다 덜 산다면 그래도 거의 그렇게 살았다고 위안할 것이고 더 산다면 나에게는 행운인 셈이다 덤으로 산다는 흔한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수도 따지고 보면 현재 그 장수하는 노인이 처하고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현재에 집중하다 보면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기 때문에 큰 의미를 주기 힘들다. 나에게는 그저 현재가 있고 현실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육체적 정신적인 현실을 자신의 경험이나 역사에 비추어 생각하고 거기서 이유나 원인을 찾고 있을 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경험이 짧으면 짧은대로 길면 긴대로 거기에 의지해서 살아가긴 하지만.
지금 밴쿠버는 비가 오는 계절이다. 날은 일찍 어둡고 바람이 불고 낮 시간은 하루의 삼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아니 모든 생물은 태양의 에너지를 먹고 산다고 한다. 오늘도 하루가 가고 내일도 와도 어김없이 지나가는 날이니 곧 동지가 올 것이다. 그러면 팥죽도 먹겠지만 해도 일찍 뜨기 시작하고 날은 매일 매일 좋아질 것이다. 이 겨울이 지나면 나는 또 한해를 늙고 다른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로 늙어가겠지.
즐거움은 오직 자신에게 있다. 의미도 자신에게 있다. 상대방에 대한 기억도 추억도 다 내 안에 있을 뿐이다. 밥 한 그릇을 먹어도 같이 먹는 사람이 있으니 좋다. 사면 사서 좋고 얻어먹으면 얻어먹어서 좋다. 그 사람과 내가 꼭 신세를 지고 베푸는 것이 잔액에서 딱 떨어질 필요는 없다. 많은 관계를 맺고 살지만 아무리 봐도 일방적인 관계는 없다.
만약 있다면 그건 아주 드믄 특별한 일일 뿐이다. 관우와 포숙아의 사이가 그런 것 아니겠는가. 관우와 포숙아만 로맨스고 나는 불륜일리 없다. 자주 만나니 신세도 더 많이 지고 갚을 날도 여전히 많다.
며칠을 비가 오더니 오늘은 반짝 해가 비친다. 우산을 들고 걷다가 접어서 들고 걷는다. 여기가 참 아름다운 곳이구나 하다가 문득 여기 아름다운 곳을 떠나서 다른 곳에 여행이라도 갔다 와야겠다고 생각한다. 밴쿠버에 사는 사람은 가까운 캘리포니아로 자주 여행을 한다. 가는 비행기 안에서 휴가를 마치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