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한국문협의 고문이신 소설가 탄천 이종학선생이 지난 7월 20일 노환으로 세상을 등지셨다. 향년 86세. 혹자는 말하리라. 그만하면 오래 사셨으니 아쉬울 것 없겠다고. 그러나 나는 아쉽다. 정말이지, 아주 오랫동안 아쉬울 듯 하다.

그와의 인연은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9년 봄. 나는 밴쿠버 교민문학을 한국과 접목시키기 위해 ‘한국문인협회 서부캐나다 지부’ 개설을 추진 중에 있었다. 당시 몸담고 있던 모 밴쿠버 문학단체의 원로 분이 한국의 누구와 접촉하면 된다고 연락처를 가르쳐 주었다. 지부 설립은 잘 추진되었고, 회원모집이 관건이었다. 캐나다에 사는 ‘한국문인협회’ 정회원이 최소한 10명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서울의 한국문인협회 측에서 캐나다 사는 정회원들의 명단을 내게 건네주었다.

탄천 선생은 그 명단에 있는 회원 중 한 분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 식으로 우리끼리만 문학을 하면 발전이 없어요. 당연히 한국의 회원들과 교류를 해야지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일을 추진해서 오히려 내가 고맙습니다.” 그와의 첫 만남에서 그가 내게 한 말이었다.

그는 1963년 선우 휘 선생의 추천으로 월간 ‘신세계’에서 소설가로 등단한 이래 13권의 장단 편 소설집과 수필집을 발간하였다. 1987년 캐나다 이민 후에도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하였던 중견작가를 회원으로 영입하게 된 것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했다.

선생의 후원으로 2009년 6월 17일 ‘한국문인협회 캐나다 지부’가 창설되었다. ‘서부캐나다 지부’에서 ‘캐나다 지부’로 명칭이 확대된 것은 탄천 선생이 서울에 응원의 전화를 해 준 공로도 무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지부 출범 후 서울 본부의 파벌싸움으로 창립기념식까지 가진 지부를 인준해 주지 않을 때도 선생은 말했다.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문인은 ‘글’로 승부해야지, 어느 유명 문학단체에 속해 있느냐 하는 것으로 판단되지 않는다. 우리만 문학활동을 열심히 하면 한국문인들도 서로 좋은 관계를 맺기 원할 것이다.’ 그 말은 현실이 되었다. 서울에 있는 여러 곳의 문학단체가 밴쿠버를 방문하여 우리 문협 회원들과 함께 행사를 했다. 선생의 선견지명이 오늘의 ‘캐나다 한국문인협회’를 만들었다.

선생이 처음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인터넷 카페에 글을 올릴 것은 ‘미니픽션’이었다. 그런 장르도 있나 싶었는데 원고지 한 두 장의 손바닥소설이 그것이었다. 재치와 유머와 교훈이 담긴 선생의 미니픽션은 삶의 단면에 깊은 고찰을 더했다.

‘이렇게 구걸을 하다가 5불이 되면 그 홈리스는 자리를 뜬다. 그리고 무엇을 하는 지 어딘가로 갔다가 이튿날 아침 다시 구걸그릇을 들고 나타나는 것이다. 그의 구걸하는 목표 한도액은 정확하게 5불이다. 그 이상은 절대로 원치 않는다. 식사는 구원단체에서 얻어 먹고, 커피 석 잔 사 마실 돈만 얻으면 된다. (미니픽션, ‘1불의 행복’ 중에서)’

선생은 알버타 주 에드먼튼에 사시는데 추운 겨울이면 가끔 LA에 사는 딸네 집에 가시곤 했다. 어느 날 코리아타운 부근에서 본 광경을 묘사했다. 재미있는 것은 부동산으로 돈을 번 한인이 돈 자랑이나 하려고 5불, 10불, 심지어는 100불짜리 돈다발을 흔들어 보였으나 그 홈리스는 자기가 하루 필요한 딱 1불만 챙기더라는 것이다. LA홈리스의 자존심은 돈 버는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덤비는 속물들 보다 더 귀하게 느껴졌다. 과유불급, 인생은 빈손으로 가는 것이다 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내용이었다.

선생도 글 쓰고 친구들과 차 한 잔 나누고, 좋은 책을 사 보는 것 이외에는 큰 욕심을 가지지 않았다. 돈과 명예를 탐내며 이전 투구하는 까마귀들과 아예 어울리지 않으며 고고히 문학의 길만 걷는 백로의 삶을 영위하였다.

마지막으로 선생이 인터넷 카페에 올린 것은 수필 한 편 이었다. 이미 암 투병 중이라 컴퓨터 자판글씨도 제대로 안 보이던 때였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열심히 카페에 글 올리는 것뿐인데, 힘이 들더라도 해야지.” 그것이 선생의 마지막 말이었다. 한국문학에의 열정은 그 어떤 고통도 뛰어 넘을 수 있었다.

‘외국에서 버벅거리는 외국어로 살아가면서 이 나이를 먹도록 영혼의 핏줄에 스며 흐르는 입맛은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음인지 제철이 되면 열무김치를 찾는다, 이제는 텃밭도 없고 열무 농사를 접은 지 오래다. 그리고 한국식품점에서 열무를 구하기 쉽지 않고 한국 음식점에서도 제 맛 나는 열무김치를 사 먹기 어렵다. 한국인이 많이 사는 미국에도 열무김치 맛은 요란스럽기만 하지 그저 그랬다. 추억은 따사로운 햇살에 녹지만 이제 그 입맛의 열망은 접어야 할까 보다.’ (수필 ‘열무김치 예찬’ 중에서)

‘이제 그 입맛의 열망은 접어야 할까 보다.’ 마지막을 예견한 듯 선생은 ‘영혼의 핏줄에 스며 흐르는 입맛’을 접으려고 했다. 그것은 비단 열무김치만이 아니었으리라. 문학에 대한 열망도 함께 접었을까? 허나 아직도 나는 그의 문학에 입맛을 다신다. ‘옥고(玉稿) 한 편 더 보내 주세요.’하면 그 힘든 암 치료에 기운이 다 빠져 있다가도 ‘그래. 어렵지만 한 번 해 보지’하던 선생의 그렁그렁 쉰 목소리가 그립다. 태어난 충남 공주 탄천을 자신의 아호(雅號)로 정하고 ‘평생 문인’으로 사신 이종학 선생. 그가 그립다. 그의 인간적 향기가 그립다. 그의 문학적 ‘입맛’은 더욱 그립다. 그가 간 외롭고 고독한 길. 나도 따를 것이다. 어느 날 다른 세상에서 조우할 때, ‘이선생. 수고 많으셨어. 이제 교민문학의 수준이 한결 높아졌어.’하는 칭찬을 선생으로부터 듣고 싶다. 그래서 가시는 길, 선생께서 좋아하시던 문학의 ‘꽃’ 한 송이 영전에 바친다. 세월 흘러도 그 사랑의 꽃 향기 변치 않을 것이다.

시들지 않는 꽃은 없다

늙지 않는 젊음은 없다.

세월 흘러 꽃의 자태 사라지면

기억 속에 남는 것은 꽃의 향기

세월 흘러 젊음의 자태 사라지면

추억 속에 남는 것은 사랑의 향기

시들지 않는 꽃은 없다

늙지 않는 젊음은 없다

(‘꽃’, 필자의 시집 ‘이방인 향단이’ 중에서)

탄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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