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후 일주일
혈관도 찾지 못해
간호사 손이 떨리는게 보였어

손 사이로 빠질 듯한 너를 안고
수술실 앞에선 아빠는
꼬물거리는 너의 발가락 만큼이나
배 고픈건 전혀 참지 못해 울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었어.

유난히도 배 고픈 걸 못 참는 너를
수술실에 보내고 아빠는 종종걸음을
걸으며 수술실 앞을 서성이며
기도하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었어.

그 수 많은 날들 강남으로
서울대병원으로 통원치료
수술 반복하면서도
아빠는 늘 혼자 할 수 없는게 많아
울어버린 날이 많았다.

그래도 배만 부르면 웃어주는 네 모습이
케이크 크림 입에 바른 너의 모습이
지옥철이라는 신도리역 푸시맨 모습을 덮고
영창 악기회사 앞을 수 없이 지나던
그 먼 출근길이 행복한 길이었으니.

이제는 아빠와 비슷해진
키만큼이나
성숙해져 아가씨 같은
너의 모습에서
어린 너의 얼굴이 겹쳐진다.

유치원 수 업시간에 선생이 옷을 벗겼다던
시간도
쇼핑몰에서 슬며서 손을 놓아
미아 신고한 네가 그림 그리며
웃고 있던 모습도
삶의 옹이처럼 가슴에 박혀
이젠 희미해져 가는 기억과 함께
낙엽지는 가을나무처럼
깊은 우물 속 들여다보듯
지난 시간을 본다.
<출처 전재민 시집 밴쿠버연가 중에서 >
사람들은 모두가 금수저를 받고 태어나길  원하지만
아빠가 흙수저라 미안하구나.
아빠도 어릴 적에  흙수저라서 부모님을 원망했나 생각해보니 그런 적은  없는 것 같다. 다만 공무원 부모를 둔 아이들의 도시락에 들어있던 달걀부침이 부러웠고 소풍에 처음으로 마셔보던 사이다가 그 친구는 처음이 아닌 것이 부러웠지.

때론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부모를 부러워했고 다른 아이들의 처한 환경을 부러워하기도 했지.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딸도  그러진 않았는지.

난  어릴때부터 가마솥에 불을 때서 밥을  할 줄 알아야 했고 시간이 나면 들에 나가 부모님의 일손을 거들어야했단다.
물론 너희들도 그렇게  뛰어놀게 하고 싶어서 캐나다로 이민 온 이유도 있다.

한국에선 너희가  태어 났을때 이미호주로 캐나다로 조기유학들을 보내고 있었고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난 내가 할 수 있는 제일 나은 선택이 이민이라고 생각했어.
이민해서 너희들이 잘 자라주길 바랐지만, 때론 인종차별에 울어야 했고 말하는게  원어민이 아니어서 자신감이 없어서 학교에서 학부형 면담할때  그냥 대답만  한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내 부모가 부모한테 받은 것 없어 고생했듯이 나 또한 열심히 산다고  살았지만, 우리 쌍둥이들한테 그땐 이리했으면 더  나았을걸 그 땐  왜 내가 그렇게 했는지 하는 생각도 한다.

남들은 수도 없이 한국에  다녀오지만  우린 한국에 자주 가지 못하고 큰 일이 있어야지만  갈 수 있었고 딸이나 아들을  25살이 되도록 한국에  한번도  데려가지 못한 무능한 아빠가 되었구나.

뭐든 해 주고 싶은 마음이야 다 똑같은 부모마음이겠지만 난 네가 사회생활을 좀 더 편하게 적응하고 살기를 바랐고 그래서 네가 원하지 않는 기술대학에 보낸 것을 네가 적성에 안 맞아서  못하겠다고  할  때 바로 알았지.
그래서 전문대 미대를 거쳐서 돌고 돌아 미술대 학사학위를 받을 수 있게 된 걸 기쁘게  생각한다. 하지만 미대졸업하고 취업이 잘 될지 걱정이 앞서기도 하지.
한국에서2살에  이민와서  처음으로 한국땅을  밟게 된 너를 보내면서 불안하고 미안한 마음이 많지만  그렇기 때문에  네가 좀 더 사회생활에 잘 적응했으면 하는 바람이구나.
지금까지는 엄마가 밥 해주는거 먹고 엄마가 빨래해 주는거 입고 하숙생처럼 집에서 다녔지만, 한국에  다녀오고 나면  좀 더  어른스러워지고  자기일은  스스로 할 수 있는 딸이 되었으면 좋겠고 더불어 부모를 떠나서 생활한다고해도 좋은 직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전재민 칼럼facebook_밴쿠버 교육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