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긴 한 숨을 쉬었다. 그때 잘못을 인정하고 돈을 발견했다고 검사부에 신고했어야 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복직될 수 있었을 터이고. 정현수와 엮일 일도 없었을 터인데. 없었던 일로 하자고 음모한 사람 중의 하나가 나였다. 질이 나뿐 여자라고 오대리가 몰아세우지만 않았어도. 돈을 훔치고도 모른 척 한다고 오해하지만 않았어도 그녀의 인생은 달라졌을 터인데. 나는 깊은 자책감에 다시는 정은숙을 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나를 알고 있었을까? 알고도 과거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일부러 모른 척 했을까? 갖가지 다른 사연들을 가지고 이민 와서는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다른 교민들처럼 그녀도 현재에만 머무르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는 정은숙을 한 번 만나 사과라도 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러나 정은숙은 한동안 종적을 감추었다. 기준범의 몇 마디를 듣고 아예 소설을 써 삐라를 돌렸던 음모의 배후인 이주일은 이제부터 모든 교민들의 화합과 단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교민회장 당선소감을 밝혔지만,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으로 회장이랍시고 교민회 기금을 개인용도로 쓰다가 결국 몇몇 회원들의 고발로 법정분쟁에 휘말려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한동안 주인 없이 표류하는 교민회를 재건하기 위한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놀랍게도 그 자리에 정은숙의 남편으로 소개받았던 사람이 위원장이 되어 나타났다. 그리고 어느 날 내게 전화를 걸었다.
이 선생님. 과거에 우리 사모님을 도와주신 적이 있으니 이번에 비상대책위원회에 들어 오셔서 교민회가 제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니, 정 사장님. 아예 밴쿠버로 오신 겁니까? 자동차부품공장은 어떻게 하고요?
하하. 미안합니다. 저는 대신자동차부품 북미지사장입니다. 이름은 한 종직이라고 합니다. 사모님이 교민사회에 좀 곤란한 루머에 빠져 들었다고 저보고 대신 남편 노릇 해 달라고 하셔서. 그 동안 본사 정 사장님의 명으로 사모님을 돌봐 드렸습니다.
아 그래요. 그런데 바쁜 분께서 어떻게 교민회 일에 관여하십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본사 정 사장님께서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모님을 교민회장으로 만들어드리라고 해서 제가 작업을 좀 하고 있습니다. 대진자동차부품 북미지사가 스폰서가 되어 교민회에 재정적 지원을 하려고 합니다. 금전적 문제는 아무 걱정 마시고 이 선생님께서 앞으로 교민회를 좀 이끌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무슨? 정은숙 회장이 아니고요?
아. 사모님은 회장 타이틀만 되찾으면 그만이라고 하셨어요. 두 번 다시 억울한 누명 쓰고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고 하셨어요. 예전에 은행 다니실 때도 그런 일이 한번 있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이선생님을 수석부회장으로 지명하고 모든 일을 다 맡기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제안을 수락하지 않았다. 30여년도 더 지난 옛일이지만 이제 막 시작하려는 젊은 처녀의 미래를 아무렇지 않게 무시해버린 내 처사도 그러려니와, 오대리가 왜 그렇게 문영옥이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는지 줄 알아? 문영옥이가 자네를 은근히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야. 질투를 엄청 했지. 모든 사건은 자네로부터 비롯된 거야, 하던 기준범의 한마디가 나로 하여금 그녀 앞에 얼굴을 들게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나를 알았을지도 모를 그녀가 단 한 번도 옛날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나와 함께 한인회 일을 했다는 사실도 나를 부끄럽게 했다.
다시 한인회장이 된 정은숙, 아니 문영옥이 금년 한인회 주최 교민 추석잔치에서도 우아하고 멋들어지게 가야금을 연주했지만 나는 참석도 하지 않았다. 장난으로 연못에 던진 내 돌멩이에 맞은 작은 개구리 한 마리가 어쩐지 문영옥의 과거와 오버랩 되어, 그 미안한 감정을 끝끝내 떨칠 수 없었다. 우기로 접어드는 10월의 밴쿠버, 그 암울한 비구름을 나는 적어도 햇살 자주 돋는 내년 봄까지는 결코 마음속에서 몰아내지 못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