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전하는 한국어 교육

강민서

 

최근 한류는 캐나다 일상 속에서 흔히 접하는 단어다. 그 예로 BTS로부터 하여 오징어게임에 이르는 한국의 다양한 문화 컨텐츠가 또래 캐나다인들에게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를 보고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냐고 묻는 캐나다인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심심치 않게 한국인이냐고 묻는 캐나다인들이 있고, ‘그렇다’고 말하면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며 한국의 이모저모에 대해 묻기도 한다. 그렇다면 캐나다에서 자란 한인 2세들에게 한류는 어떠한 의미를 가질까? 나는 이들에게 있어 한류란 관심과 무관심이 공존하는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내 또래의 한인 2세들은 한국인과 캐나다인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는 한다. 이들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관심을 갖기도 하지만, 때때로 이들에게 있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애써 감추고 싶은 무관심의 영역에 속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이들은 캐나다인들보다 한류를 멀리하기도 한다.

2여년 전 내가 캐나다에 처음 왔을 무렵 나는 꿈에서나 볼 법한 캐나다의 풍경을 감상하는 일에 빠져 있었다. 밤새 내린 비가 흙을 촉촉하게 적신 탓에 나는 흙내음과 크고 작은 새들의 노래와 숲에서 피어 오르는 솜사탕 같은 새하얀 구름을 감상하는 일에 말이다. 낯선 땅과 낯선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새로운 세계를 접할 수 있다는 설레임이 컸던 시간이었다. 그러던 중에, 나는 아인이를 만났다. 나는 아인이를 보고 단번에 한국인임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에서 나는 한국어로 아인이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하지만 나의 예상과도 달리, 아인이는 내가 던진 한국어 인사에 영어로 퉁명스러운 대답을 내놓았다. 당혹감을 잠시 뒤로 하고 몇 마디 대화를 이어 나가며, 나는 아인이의 가족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아인이는 한국계-캐나다인으로 부모님 모두가 한국인이셨으나 부모님이 일찍이 캐나다로 이민을 오신 탓에 캐나다에서 나고 자랐다.

나는 이제야 이해를 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대화는 거기서 멈추고 말았다. 멀찍이 서 지켜본 아인이는 늘 생각이 많거나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이유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가늠하지 못한 채 막연히 아인이를 위로해주고자 아인이의 곁을 맴돌았다. 아인이는 한국어가 서툴고, 나는 영어가 서툰 탓에 대화가 매끄럽게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아인이도 나의 진심을 느꼈는지 자신의 속마음을 터놓기 시작했다. 나는 아인이가 서툰 한국어로 옮긴 속마음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 아인이는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일까?”라고 말했다. 나는 아인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당연히 한국 사람이지”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아인이의 생각은 나의 대답처럼 간단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아인이가 한국이름이 있고 한국음식을 좋아한다는 점을 들어 한국 사람이라고 말하려 했지만 영어가 서툰 탓에 이를 제대로 전하지는 못한 것 같다.

지금처럼은 아니지만 아인이와 처음 만났을 때도, 나름의 한류가 있었다. 나는 아인이와의 공감대를 만들고자 케이팝에 대해 물었지만, 아인이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관심을 애써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캐나다의 한적한 길을 걸으며, 나는 아인이와의 성근 대화를 이어갔다. 사슴 한 마리가 지나가고 다른 사슴 한 마리가 그 뒤를 쫓았다. 사슴은 서로 말 한마디 내뱉지 않지만 마치 눈빛만 보면 그 진심을 아는 듯이 함께 행동했다. 개울에는 다람쥐 두어 마리가 재롱을 떨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떠한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다람쥐들은 서로에게 마음을 끌리는 듯 놀고 있었다. 나는 아인이에게 사슴과 다람쥐를 손가락으로 가리켜가며 이러한 사실을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아인이는 그러한 나의 행동이 웃겼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아인이가 처음으로 웃는 것을 보고 따라 웃었다.

‘이심전심’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한다는 뜻이다. 나는 ‘마음’이라는 단어를 아인이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마음’에 대응하는 영어 단어가 없다고 생각한다. ‘마음’이라는 단어의 발음이 마음에 들어서이기도 하겠으나, ‘마음’을 생각하면 느껴지는 복잡한 감정들 그리고 아인이에 대한 생각들이 겹쳐서인지도 모르겠다. ‘마음’이라는 단어와 함께, 영어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한국 단어들이 있다. ‘얼’, ‘정’, ‘한’과 같은 단어들이 그것이다. 나는 한류 열풍이 반갑지만, 그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한국어로밖에 설명될 수 없는 그 무엇들을 여전히 전하고 있지 않다는 인상이 들곤 한다. 가령, 노래의 가사나 드라마의 대사에 따라붙은 영어 번역을 보자면 그러하다. 한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새로운 언어 하나를 습득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어 교육이 중요한 이유는 한국어를 배운다는 것이 ‘마음’을 주고받는 일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만이 공유할 수 있는 가치들을 배우는 것이 곧 한국어를 배운다는 일이 아닐까?

내가 사는 밴쿠버에는 다양한 한국어 수업이 있다. 밴쿠버에 있는 한글 학교에서는 한국문화와 한국어 교육에 힘쓰고 있다. 한류에 힘 입어,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국가의 학생들이 한글 학교를 찾아온다. 머나먼 타국에서 한국어가 들릴 때면, 나는 한류의 파급력을 체감하곤 한다. 하지만 앞에서 말하 바와 같이, 그 한류가 우리의 한인 2세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한국어 수업이 마련되었으면 한다. 선생님과 학생이라는 뚜렷한 구분이 있는 교실에서는 마음을 나누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하여, 또래 집단끼리 멘토-멘티가 되어 이루어지는 한국어 수업이 있었으면 좋겠다. 한국어 수업에서, 비교적 한국어에 익숙한 캐나다 유학생들을 한글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한인 2세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면, 한인 2세들은 표면적인 한류를 넘어, 그 이면에 있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아인이의 경험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 가운데 우리는 캐나다라는 타국에서도 ‘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익히며, 한국어를 통해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그렇다면 한국에 대한 생각들이 이전보다 더 풍성해지지는 않을까? 나에게도, 아인이에게도, 그리고 모든 유학생들과 한인 청소년들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