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하게 살던 마을에 강도떼가 밀어닥쳐 집주인을 몰아내고 안방을 차지하고 앉아 주인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라고 감언이설을 하면서도 사실상 전 주인은 거의 노비로 전락하고 말았다. 조금이라도 거역하는 낌새를 보이면 가혹하게 매질을 하고 곳간에 가두었다. 혹독한 고생을 참지 못한 식구들은 더러 집을 떠나 정처 없이 떠돌았다.
강도들은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들과 집안의 값나가는 물건들을 내다 팔아 돈을 벌고, 전 주인의 식구들이 애써 농사지은 쌀과 작물을 겉으로는 돈을 주고 샀다고 하면서 헐값에 사서 팔았다. 전 주인은 먹고 살 여유도 없이 봄이 되면 식량이 떨어져 보릿고개를 허기진 배를 안고 넘어야 했다.
강도들은 호의호식하면서 떵떵거리며 살고 집안을 새로 고치고 페인트칠을 하고 담장을 높여 수리하고 곡식 창고를 큼지막하게 여럿 만들기도 했다. 집안에 새로 가재도구를 들여놓고 큰 소리 치면서 나날이 부자가 되면서 살았지만 노비로 전락한 전 주인에게 돌아오는 것은 서러움과 배고픔 밖에는 없었다. 전 주인은 언제 이 세상이 바뀔 것인가 노심초사하면서 하루하루 힘든 세월을 살았다.
마침내 어느 날 먼 동네에 살던 힘센 장정들이 밀어닥쳐 강도들의 멱살을 잡고 끌어냈다. 주모자는 처형하고 나머지는 제가 살던 고향으로 똥줄이 빠지게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그동안 살림은 늘었다고 하지만 하루아침에 종살이 하던 사람들이 안방에 들어앉으니 마냥 낮 설기만 했다.
어떤 사람들은 강도들이 도망가면서 가지고 있던 살림을 챙기지 못하고 빈손으로 갔다고 안타까워하고 돈 한 푼 없이 고향에 가서 어찌 살 것인가 걱정을 해주었다. 심지어는 강도를 당한 집주인이 살림이 나아졌으니 강도들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감사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집주인이 강도들에게 대대로 살아오던 집과 땅을 빼앗기고 종살이로 전락해서 비참하게 살던 때는 도리어 동정하지 않았었다. 다만 강도들이 차지하고 있던 동안 살림이 불어나고 곳간에 식량이 전보다 많이 쌓이게 되었다며 집안 형편이 나아졌다고 좋아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고 있다.
일제 식민지 착취론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을 식민지화해서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하고 약탈하였다고 비판하는 이론입니다. 식민지 착취론은 식민지 지배자들이 개척 지역의 자원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수확하고, 지역 주민들을 노동력으로 이용하며, 현지 문화와 경제체제를 파괴하는 것을 비판합니다. 이러한 착취와 약탈은 종종 지역 주민들의 극심한 빈곤과 참기 힘든 고통을 야기하며, 현지 경제체제와 전통 문화와 생활 방식을 파괴하여 자주적인 역량을 함몰시키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방해합니다.
일찍이 조선민족은 3.1독립운동을 통해 일제 식민지배에 저항하고 자주독립을 외쳤으며 1923년에는 ‘조선혁명선언’을 통해 이러한 의사를 분명히 한 바 있습니다.

조선혁명선언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의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천택(川澤)·철도·광산·어장 내지 소공업 원료까지 다 빼앗아 일체의 생산기능을 칼로 베이며 도끼로 끊고, 토지세· 가옥세·인구세· 가축세·백일세(百一稅)·지방세·주초세(酒草稅)·비료세·종자세· 영업세·청결세·소득세 – 기타 각종 잡세가 날로 증가하여 혈액은 있는 대로 다 빨아가고, 어지간한 상업가들은 일본의 제조품을 조선인에게 매개하는 중간인이 되어 차차 자본집중의 원칙 하에서 멸망할 뿐이요, 대다수 민중 곧 일반 농민들은 피땀을 흘리어 토지를 갈아, 그 일 년 내 소득으로 일신(一身)과 처자의 호구 거리도 남기지 못하고,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일본 강도에게 갖다 바치어 그 살을 찌워주는 영원한 우마(牛馬)가 될 뿐이오, 끝내 우마의 생활도 못하게 일본 이민의 수입이 해마다 높은 비율로 증가하여 딸깍발이 등쌀에 우리 민족은 발 디딜 땅이 없어 산으로 물로, 서간도로 북간도로, 시베리아의 황야로 몰리어 가 배고픈 귀신이 아니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귀신이 될 뿐이며, <중략>

이상의 사실에 의거하여 우리는 일본 강도정치 곧 이족통치가 우리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殺伐)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1923년 1월 의열단
단재 신채호

식민지 착취론에 반하여 식민지 개발론은 발전된 국가가 발전되지 않은 국가를 대신 경영하여 식민지 지배자들이 개척 지역의 자원을 수확하고, 공장을 세우고, 교육 체제를 구축하여 지역 주민을 종교적, 사회적 및 경제적으로 변화 발전시켰다는 주장입니다.
핵심은 이러한 개발 의도나 성장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느냐는 것입니다. 한반도의 개발과 성장은 조선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위한 군수기지화와 자국 이주민들의 이익을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조선인들의 자주적인 근대화 기회를 박탈하고 오직 노동자와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아예 조선인들은 개발 능력이 전혀 없이 오직 일제의 힘으로 그나마 발전했다고 독단하고 있는 점입니다.

“해방 후가 되면 일제시대의 그 급속했던 개발의 결과물들이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고 한국은 다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농업국의 하나로 남겨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왜 이런 극단적인 변화가 일어났을까? 우리는 그 해답을 개발의 주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일제시대의 개발은 한마디로 말해 ‘일본인들의 일본인들에 의한 일본인들을 위한’ 개발이었다.”
<개발 아닌 개발> 허수열

식민지 개발론은 일부 경제학자들이 외형적인 통계숫자에만 매달려서 실제 사실이 발전을 나타내고 있다고 주장하는데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측면만 고려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발전의 허상을 감지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발전시켜준 일본에 감사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27대 임금들은 아무 것도 해놓은 일이 없는데 일본이 들어와서 전기, 철도, 수풍댐, 공장 및 학교를 지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우리 아버지 세대에는 아이폰도 없고, 칼라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도 없었으니 얼마나 한심하냐고 말해도 되는 것인가요.
우리나라에 전기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87년 3월6일 경복궁 안의 건청궁이었다고 합니다. 1899년에는 인천과 노량진 사이에 최초의 철도가 개통되었습니다. 세계적으로 기초 국민 교육을 국가가 주도적으로 시작한 것은 근세에 들어와서 입니다만 한국은 오래전부터 마을마다 서당과 향교가 있고 서울에는 성균관(1362년 설립)이라는 고등교육기관이 있었습니다. 일제가 없었으면 우리나라는 아무 것도 못할 뻔한 그런 나라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고대로부터 가까운 나라입니다.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세계에서 제일 가까운 나라는 말할 것도 없이 두 나라입니다. 가까운 나라일수록 역사적으로는 애증이 쌓이게 마련인데 그럴수록 서로 이해하고 협력하는 것이 다투고 미워하는 것보다 훨씬 서로 국익에 합당합니다.
착취냐 개발이냐는 문제는 하나를 선택할 대상은 아닙니다. 착취라는 측면도 있고 또한 외형적으로 개발되었다는 측면도 없다할 수 없습니다. 역사는 기억하고 배우라는 것이지 그것으로 인하여 언제까지나 미워하기만 하고 주먹질만 할 수는 없습니다.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원망하는 마음도, 덮어놓고 좋아하는 마음도 접어둘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