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장성한 두 아들이 있다.
25년 전 초등학생이던 아이가 지금은 모두 가정을 꾸렸다. 태평양을 건너 낯선 서구 사회로 이주를 결정을 했던 가장은 진갑을 넘긴 젊은 노인이 되었다. 세월은 그렇게 속절없이 빠르게 흘렀다. 어엿한 주류 사회 속 직장인으로 자리잡은 1.5세로 성장한 자식들은 독립된 가장이다.
첫째는 최근 3주일 전에 아들을 낳아 아비가 되었고, 나에게는 할아버지라는 색다른 인생 체험의 큰 행복을 선물했다.
며느리가 첫 손자를 낳던 날의 나의 기다림은 호기심과 궁금이 섞인 초조함의 연속이었다. 32살의 아기 엄마는 브라질 태생으로 한국어가 서툰 서양인이다. 정확히는 친정엄마가 홍콩 분이었으니, 그녀 역시 혼혈로 이미 글로벌 시대의 새로운 젊은 세대의 한 사람이다. 동서양이 교차하며 세상은 빠르게 변화한 지도 벌써 오래되었다. 30대 후반에 이민을 결심하고 떠나 온 고향 나라와의 작별은 어쩌면 나에게도 글로벌 시대의 시작을 의미했을 것이다.
‘아버님, 안녕하세요..” 마주할 때마다 며느리가 나에게 하는 유일한 한국어 구사능력이다.
살갑게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지으며 환하게 맞아준 지도 벌써 4년이 되어간다. 대학교 캠퍼스에서 만나 결혼에 이른 큰 아들 내외는 이제 아비와 어미가 되었다. 조금은 늦었지만 최근 젊은이들 추세에 비춰보면 일반적일 수도 있는 가정을 이룬 셈이다. 영어권 사회로 이사를 와서 성장하며 교육과 사회 생활을 거치는 동안 자식들은 나와는 달리 새로운 가치관이 생성된 듯하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달리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캐나다에서 자라며 형성된 나름의 주관이 뚜렷해진 청년들이다. 큰 며느리 역시 어린 유년기에 친정 부모를 따라 홍콩, 브라질을 거쳐 이곳에 정착하고 성장했다. 전혀 다른 문화와 관습의 이질감을 이해하고 넘기며 맺어진 신세대 커플인 것이다.
4년 전 평소 돌아가신 어머니가 자주 들르며 산책과 미사를 올리던 작은 성당에서 결혼식을 가졌었다. 아름다운 포트 무디 작은 마을에서 조촐한 스무 명 남짓한 가족과 지인 몇몇이 전부였다. 저희들이 스스로 중심이 되어 준비하고 치른 소박한 혼인의 예를 마치고, 이곳 코퀴틀람 아담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알뜰한 살림을 하며 직장을 병행한 큰 며느리가 드디어 나에게 첫 손자를 안겨 준 지난 년 말은 정말 짜릿한 흥분의 느낌이었다. 본래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시아버지를 한 순간에 바보로 만들어 놓았다. 매일 손자를 들여다보고 싶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배려해주는 착한 며느리이다. 한국에서 아이 탄생을 기대하며 찾아 온 시부모를 위한 며느리의 예쁜 마음씀씀이에 감동을 받았다. 내일 아침이면 한동안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우리에게 밴쿠버 체류기간 동안이라도 거의 매일 손자를 보게 한 것이다.
“왜 너는 친정에 가서 해산 후 몸조리도 하고, 아기와 함께 편안히 지내다 오질 않느냐?” 하고 물었다. 엊그제 출국을 앞두고 큰 아들내외 아파트에서 며칠 함께하기로 한 후, 궁금한 질문을 던졌다.
“호호호..당연히 저는 친정 집에 가서 지내고 싶지요..그런데 시부모님이 머무르는 동안에는 이렇게 오셔서 손자와 만나게 하려고요..”
비록 영어로 말한 며느리와 시아버지간의 짧은 대화였지만 깊은 뜻에 가슴이 뭉클했다.
지척 거리에 친정 부모가 거주하여 잦은 왕래를 하고 있지만 남편의 부모를 향한 며느리의 큰 사랑에 마음이 흐뭇해졌다.
어설프게 손자를 달래며 이들과 지내는 짧은 시간 속에서 내일이면 아쉬운 작별이 다가온다. 어쩌면 손자가 보고 싶어서라도 서둘러 일을 마치고 돌아올 것 같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듬직한 사내 녀석으로 커 갈 아이와 착한 며느리를 어찌 보고 싶지 않으랴.
지난 주초에 시어머니 환갑 날에도 풍선과 꽃으로 아파트 내에 장식을 하고, 조촐한 음식과 선물을 준비했다. 3대가 모인 가족간의 한끼 식사 시간이었어도 행복이 가득한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작은 며느리감도 홍콩에서 태어났으니 이래 저래 우리 가족은 글로벌 가족이다. 스스로 영어는 물론이고, 중국어, 포르투갈어를 배우며 종종 두 며느리들과도 친근감을 표시할 생각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며 우리 같은 기성 세대의 의식 변화를 주문하고 있다. 특히 캐나다에서 살아가는 지금 21세기 주인으로 태어난 손자의 미래를 위해서도 뭔가 새로운 가치관 방향만큼은 세워야 할 것이라는 책임감이 느껴진다.
김치 찌게까지는 먹을 줄 아는 큰 며느리에게 김치를 먹을 수 있고, 청국장을 즐길 줄 아는 그 날까지 시아버지로서 열심히 살아가련다.

 


당선소감

고향나라에 머물고 있는 지금,  한카 문학상 버금상 수상 소식을 조금전에 받았습니다. 문득 떠나오기 전, 새로운 가족이 탄생한 의미를 뭔가 남기고 싶어서 산문 형식으로 제출했었지요.
유년 시절부터 미술과 문학에 대한 갈증을 지난 세월만큼이나 뒤늦게 습작을 통해서 해소를 하는 셈입니다. 1992년 1월 13일 캐나다로 이주를 한 이후에도 낯선 나라에서의 정착과정속에서도 언제나 저에게는 글이란 친구가 있었습니다. 비록 미흡하지만 내재된 저만의 감성과 느낌을 표현해가며 쉼없이 글을 쓰며 지냅니다.
때로는 술 한잔하고 난 이후에 찾아오는 외로움과 허전함을 달래기도 했고, 음악과 더불어 노트북 글자판을 무심코 두드리며 생활속에 자리잡은 지도 20 여년이 되어갑니다. 부족한 필력을 보완하며 생을 다하는 그날까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글로써 표현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가슴속 글에 대한 열정과 감성은 영원히 타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