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해를 어떻게 보낼까 걱정하던 때가 있었다.
무엇이 그토록 나를 못마땅하게 했으며 답답하고 우울하게 했을까?
거기에는 내가 정해 놓은 몇가지의 틀이 있었다. 곧 열등의식과 우월감 , 결핍과 만족이란 것이 따로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그 일들이 나를 지배하는 줄은 모르고 어떤 정해진 행위로 바꾸고 채우려고 했다. 그럴 때 기분을 바꾸고 상식에 잣대를 갖다 댈 때도 있었지만 조금 더 분명한 기준이라고 여기는 도덕이나 윤리에 취중하고 그에 맞추는 삶을 추구하기도 해보았다. 더 나아가서는 옛 성인들의 가치관을 내 삶에 적용시키려고 윤리를 거론하기도 했다. 결국은 양심법과 교리를 따르게 하는 종교의 힘에 의탁하기도 했지만 신의 존재와 보살핌도 내가 만든 모습의 조작이었다는 것이다.급기야 더 깊은 생각 세심한 도덕적 가치기준을 현실의 삶에 적용시키면 이 답답하고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나리라고 생각하고 행동하기도 했지만 더 큰 혼란을 맛보기도 했다.결국, 생각으로는 옳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행동이 따라주지 않았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겠다는 그 일 또한 감정에 묶이는 일이었고 내가 갖고 있는 마음(본성), 진실을 을 확인할 수 없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 거듭될 뿐이었다.그러므로 그 진실은 도덕, 윤리, 상식 등의 이런 일들이 고정된 규칙에서 얻어지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이 이쯤 되면 우리는 무얼 할 수 있을까?
딱히, 해야할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은 더더욱이 없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자신 미워하고 비관하는 일과 누군가가 못마땅하여 불평하는 일이 일색일게다. 그때, 아침에 눈떠서 하루해를 어떻게 보낼까하는 일들이 그 동안의 내가 했던 이런저런 방법으로
해결되었더라면 이 마음공부, 즉 선(禪)공부의 문턱에 들어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의 삶에 있어서, 그동안의 했던 일들은 나의 의지에 의해 노력하고 절제하고 끊어내는 일들이 있었지만 그 모두는 인위적이고 내가 만든 틀에 끼워맞추기 식의 조작된 방법이었음을 이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그 조작된 방법의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잠깐의 위안을 받는 일이 “나만 이런 것이 아니고 세상살이 다 그렇지 뭐” 하거나”그래도 이런저런 일로 그 사람보다는 내가 나은 삶을 살고 있잖아”하고 스스로 위로를 한다고 하지만 과연 위로가 될까? 그런 삶은 “자유”가 뭔지를 살아보지도 못하고 한 세상 마감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 이상 용납이 되지 않았다.
이 공부는 참 자아 (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며 우리의 번민과 갈등에서 오는 무기력함까지도 마음(본성)이 확인된다면 해결되는 것이고 그 일은 지금 눈앞에 밝고 뚜렷해서 의심이 없고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확인되는 일이기에 의문과 답답함이 나를 지배하지 않게 된다.그러기에 모든 종교에서 지향하는 정점은 이 본성 (진리)를 확인하는 일이고 그렇게 아무일 없는 사람으로 살아진다는 것이다.그렇다고 특별하게 사는 것도 아니고 아주 평범하게 사는 삶이다.

이 공부를 시작해서 법문을 듣고 있거나 시작하고자 한다면 먼저, 이 진실(깨달음) 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캄캄한 상태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고 체험하는 일이 최우선이고
체험하는 그 이후부터 공부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체험하기 위한 공부는 먼저 체험한 선지식의 법문을 듣는 일이 공부에 큰 도움이 될 수 있고 이를 “법 비”가 내린다고도 말을 한다.이 공부를 하다보면 이런저런 갈등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있을수도 있지만 그 캄캄함이 도움이 되고 가시처럼 목구멍에 걸려 이래도 저래도 못하고 꽉 막혀버릴때가 있는데 이를, 은산철벽 혹은 금강권 율극봉 이라고도한다. 그 아픔과 답답함이 약이되고 체험과 부활을 맛볼수있는 필수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지난 2주동안 은퇴로 인한 노후대책에 대해 칼럼이 나가게 되었다.
돈과 시간관리를 누구와 소통하면서 어떻게 할것인가에 대해 나열해 보았지만, 마음이 온전치 않다면 매니지먼트가 잘 되지도 않겠지만 설령, 시간 있고 돈이 있다고 해도 삶이 그닥, 즐겁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모두는 잘 알고 있는 터이다.

나는 왜 이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으며 동기부여는 무엇이었을까?
자녀들의 삶은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었다. 그들은 적어도 내가 살아온 삶보다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고 기대 했지만 그들의 힘겨워하는 모습은 지난날 나의 삶과 별반 다를게 없었다. 자녀들은 부모가 시키는 일은 하지 않아도 본데로는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 마음공부로 인해 나의 못난이의 습관이 떠나간 자리에 맺어진 열매를 따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의 말을 들어주고 인정해주고 힘들다고 하면 먼저 손 내밀 수 있는 여유와 자유가 함께하고 있다.

어린시절, 친정 아버지께서 “상 위의 맛나는 음식은 다른사람 앞으로 밀어주고 힘들고 궂은 일은 내가 많이 하라”고 하신 말씀이 요즘 들어 자주 떠 오르게 된다.
이제 나의 삶에 이런 일이 아무런 조건없이 그냥 행해지고 있음을 볼때, 마음이 편해지는 일은 인생의 “일대사” 라고도 하는 본성을 체험하는 일을 경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 일은 세상을 다 가진 부자가 되는 일이고 가장 안전한 노후대책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