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초에 우리는 구로동에 살고 있었다. 그 당시 영등포구 구로동은 서울 외곽으로 미개발 상태였고 버스 다니는 길만 겨우 아스팔트 포장도로였다. 집 동네 길들은 온통 불그스름한 갈색의 진흙땅이었다. 내 학교는 집에서 서너 블록 되는 거리였지만, 보행이 불편한 내가 걸어 다니기에는 무척 먼 거리였다. 더욱이 비 오는 날은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질척질척한 진흙땅을 도저히 나 혼자 걸어 다닐 수가 없었다. 비 오는 날의 고역이었다. 엄마가 등하굣길에 데려다주시고 데리러 오시곤 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어느 봄날 오후였다. 그날은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겨서 대신 6학년이었던 꼬마 오빠가 학교 파한 후 나를 데리러 왔다. 나는 그날 학교에서 따뜻하고 고소한 옥수수빵 두 덩이를 받았다. 가난하고 배고팠던 시절, 60년대 중반이었다. 그 당시 미국의 원조로 받은 밀가루와 옥수숫가루로 옥수수빵을 만들어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급식으로 한 덩이씩 주었다. 선생님은 시험지를 백 점 받은 아이들에게는 빵을 한 덩이씩 더 주시곤 했다. 우리는 집으로 걸어가면서 내 어깨에 멘 책가방에서 솔솔 풍기는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먹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입안에 군침이 살살 돌며 침이 꼴딱꼴딱 넘어가고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면서 더욱더 허기진 배를 느끼게 했다. 집에 빨리 가서 꼬마 오빠와 같이 옥수수빵을 먹고 싶었다. 힘없는 다리로 발목까지 진흙땅에 푹푹 빠지면서 걸어가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가눌 수 없이 후들거리는 오른쪽 발을 한 발자국씩 떼어 놓기가 어려웠다.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장화도 사서 신을 수가 없었다. 구멍 뚫어진 내 신발과 양말까지 온통 찐득찐득하고 미끌미끌한 진흙이 달라붙었다. 쭈르륵 미끄러질 뻔했다. 진창만창이 되었다. 무거워진 오른발을 손으로 끌어내면서 마냥 마냥 한 걸음씩 내디디며 힘들게 집으로 갔다. 아예 신발까지 진흙 속에서 벗겨졌다. 진흙으로 온통 덮여 무거워진 신발을 더는 신고 걸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신발을 벗어서 손에 들고 걷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한 손에는 진흙으로 범벅이 된 신발 한 짝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꼬마 오빠 팔을 붙잡고 걸어갔다. 꼬마 오빠는 나를 등에 업고 가겠다고 했으나, 세 살 터울의 꼬마 오빠한테 내가 너무 무겁고 힘들 것 같아 한사코 그냥 걸어가겠다고 했다. 비닐우산도 없이, 우비도 못 입고 비를 쫄딱 맞았다.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집에 왔다. 나는 얼른 책가방에서 옥수수빵 두 덩이를 꺼내 통째로 한 덩이를 꼬마 오빠한테 주었다. 꼬마 오빠는 헤벌레 웃으며 좋아했다.
한 덩이는 엄마와 언니와 나눠 먹으려고 했지만, 엄마는 배가 아프다고 싫다고 하셨다.
엄마는 맛있는 것을 보시면 언제나 배가 아프다고 하시며 안 잡수셨다. 나를 데리고 오느라고 애를 많이 쓴 꼬마 오빠가 한없이 고마웠다. 많이 먹으라고 내 옥수수빵에서 더 떼어 주었다. 연신 싱글벙글 냠냠 맛있게도 먹는 꼬마 오빠를 바라보며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흐뭇했다. 무던히도 착하고 인내심이 많았던 꼬마 오빠는 어렸을 적에도 그렇게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나를 정성껏 돌보아주었다.
그리도 맛있던 그 옛날 추억의 옥수수빵, 잊을 수 없는 그때의 그 맛을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

 


당선소감

미숙한 글을 선정해주시고 과분한 수상을 안겨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뒤늦게 걸음마 시작하는 저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시며 열심히 습작하라는 의미로 새겨듣겠습니다. 일찍이 하늘나라에 간 꼬마 오빠를 향한 가슴 저리는 그리움을 달랠 길이 없어 노트장에 그저 끄적거렸습니다. 캐나다한국문인협회를 이끌어가시기에 열정과 전력을 다하시는 모든 분께 고마운 마음 가득 전하고 싶습니다.

 

**글쓴이 | 김화숙
진명여고.1974년 캐나다 이민. 토론토 대학교 졸업. B.C.I.T. 졸업. 예술대학교 강사, 문예창작대학 9기 수료. 캐나다한국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