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이를 좋아한다. 어찌나 종이를 좋아했던지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문방구 가는 것을 군것질을 파는 가게에 가는 것보다 자주 갔고 용돈이 생기면 각종 종이를 사서 모으는 것이 컬렉션이 무엇인지 모르던 시절의 나의 컬렉션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종이를 사는 것과 책을 읽는 것은 상관없는 일이다. 하긴 책을 사는 일과 책을 읽는 일도 상관없는 일일 것이다. 그렇긴 해도 화투를 좋아하거나 주전부리를 좋아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았나하며 위안한다. 내가 문방구에서 샀던 종이와 공책은 대부분 글을 쓰거나 그림 그리기용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래선지 몰라도 나는 편지쓰기, 문학 작품 베끼기를 많이 했다. 손쉬운 복사 방법이 없었던 내가 어렸던 그 때, 나는 내가 누구에 보낼 편지를 노트에 베껴서 보관한 편지재록(片紙再錄)이라는 제목의 공책도 있었을 정도다. 나는 지금 까지도 무언가를 많이 베낀다. 아마 시를 많이 베껴서 지금 시를 쓰게 된 건 아닌가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지금도 특이하고 멋있는 종이나 노트를 보면 사고 싶고 사서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기도 한다.
이렇게 내가 가지고 있는 종이나 노트는 글을 쓰는 바탕으로 쓰일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긴 해도 바탕의 부분만은 아니다. 나는 그것을 오히려 완성된 상품이라고 본다. 같은 의미의 물건으로 그릇을 들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주목적이 바탕으로 쓰이기 위해 만들어진 완성된 물건일 뿐이다. 그것들을 잘 완성시키려면 종이에는 무엇인가를 거기 써야 하고 그릇은 무엇인가를 담아야 한다. 그것들은 그래야 완성된다. 그것들은 완성을 위해서 기다리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바탕이란 무엇일까? 바탕의 사전적 의미는 물체의 뼈대나 틀을 이루는 부분. 사물이나 현상의 근본을 이루는 것. 타고난 성질이나 재질. 또는 체질이라고 나와 있다. 무엇의 기본, 기초 그리고 근본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서포트(support)하는 것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근본이 되어야 해”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보통 근본이나 기본(바탕)을 보지 않는다. 오직 거기 나타난 걸 본다. 나타난 것만을 보지 않는 사람은 지혜가 있는 사람이거나 부분만을 보지 않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더 보는 사람이다. 더 본다는 말의 의미는 전부를 본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 바탕은 보이는 것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왜 그것을 보지 못하는 걸까? 나타나는 부분만을 보아도 다 알 수 있기 때문일까?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보니까 보여주는 사람들도 자신이 보이고 있는 부분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바탕을 아예 보지 못헐 것이라고 간주하게 된다. 그러나 보고 있는 것, 보이는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보인다고 다 있는 것도 아니듯이 보이지 않는다고 다 없다고 할 수 없다.
물체와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바탕과의 관계는 불교의 연기(緣起)를 떠올린다. 연기는 단순히 한 종교의 교리라기보다 공리(公理)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는 말은 우리는 누구나 과거가 있으므로 현재가 있고 현재가 있으므로 과거가 있다는 말이다.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의 과거와 상관없는 현재가 있다고 보기 힘들다. 보는 사람은 보이려고 하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 빠짐없이 본다.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이는 사람은 보이려고 하는 것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모두 다 보이고,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이 속는다. (물론 이것은 사람에만 국한하지는 않는다.)
중학교 시절 이침 조회 시간에 교장 선생님의 훈시에서 기억나는 것이 있다. 외출할 때 짙은 화장을 하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이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면서 자신의 처지에 맞지 않는 사치한 생활을 하지 말고 기본이 튼튼한 삶을 살라는 경계의 말씀을 자주 들었다. 나의 세대는 가난하게 살아서였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옳다고 배우면서 살았다. 지금 똑같은 상황을 보고 젊은이들에게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어떤 환경에 있다하더라도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즐길 권리가 있다고 말하지 않을까? 이민 와서 채소가게에서 힘들게 일하는 사람이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보면 “저렇게 힘들게 벌어서 왜 저런 사치를 하지?” 하며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좋은 차를 타는 것이 그 사람의 취미이고 그 사람의 인생의 기쁨이라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생각이 옹졸하고 편협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잘 보자. 정확하게 보자. 넓게 보자.”고 항상 마음에 되뇌고 되새긴다. 우리 모두는 자신을 솔직하게 보이고, 보여주고 있다. 아니 이런 말이 강조로 적합하다면 <보여 지고> 있다라고 말할 것이다. 나도 그렇게 보이고 있고 남들도 다 그렇게 보이고 있다. 우리는 그 보이는 것을 보고 있다. 잘 보자, 정확하게 보자, 넓게 보자라는 말은 단지 보는 것의 선악을 따지자는 말에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무엇이든지 다 바탕이 있다. 그것은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마치 시공간과 같다. 그러나 사물(事物)과 바탕을 구별해서 보는 것도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가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다 다를 것이다.
바탕은 현재의 과거일 수도 있고 나타나는 것을 지탱하는 기본이기도 하고 미래에 대한 현재이기도 하다. 또 나의 주위의 사람들은, 내가 아는 사람들은 나의 바탕이다. 내가 낳은 자식이라 하더라도 자식도 배우자도 친구도 직장 동료도 나의 바탕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살고 있는 환경도 나의 바탕이다. 내가 모르는 나의 이웃도 앞산도 강도 바다도 내가 보지 않아도 날아다니는 새도 해도 달도 모두 나의 바탕이다. 그리고 바탕과 바탕 위에 있는 무엇(實體)은 대비를 이룬다. 바탕과 바탕 위에 있는 무엇은 나 일수도 있고 너 일수도 있다. 그것은 나이기도 하고 너이기도 하다. 나는 풍경이었듯이 나는 환경이고 다시 나는 풍경이다. 나는 전부이면서 부분이고 부분이면서 전부인 근거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