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하고 뜨거운 기운이 등줄기에 훅, 끼친다. 갑자기 덥다. 정수리가 홧홧하고 잔등에 눅눅한 진땀이 밴다. 요즘 가끔 이런 증상이 스친다. 우울하고 불쾌하고, 자고 나면 아픈 데가 생겨나기도 한다.
병은 아니라고, 늙느라 그런다고, 그러다 저러다 지나간다고, 선배들이 이야기한다. 칼슘 제와 혈액순환 개선 제, 몇 가지 비타민을 복용하는 친구도 늘어났다. 건강 이야기가 어느 모임에서건 빠지는 법이 없듯, 운동을 안 하는 나는 야만인 취급을 받는다.
야만을 벗어보려 저물 녘 가을 천변을 걷는다. 머리 젖은 억새들이 은빛으로 일렁인다. 바람이 불적 마다 휘청 쓰러졌다. 주섬주섬 다시 일어서는 풀들. 푸른빛이 막 사위기 시작한 초가을 풀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눈가가 핑그르르, 실없이 젖어 든다.

아, 이것들도 따가운 가을 햇살에 제 몸을 말리고 있구나. 삽상한 듯 냉혹한, 생기를 거두어가는 바람 앞에서 하릴없이 누웠다 일어났다 하면서 몸 안의 진액을 증발시키는 중이구나. 축축한 물기를 다 발산하고, 촉촉한 감성 모두 반납하고, 그렇게 메마르고 가벼워져서 아득하고 아찔한 고요의 깊이에 당도하는 일, 그것이 목숨이 치러내야 할 준열한 절차요 생명의 궁극적 귀착점인 거구나.

삶은 농담 같은 진담, 목숨은 예외 없는 필패(必敗). 그보다 더 쓸쓸한 일은 무심한 척, 쾌활한 척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속으로만 진땀을 흘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는 일의 시름과 덧없음마저 춤으로 환치할 줄 아는 저 가을 억새처럼.

문인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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