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말하는 빨간약 말이다.
내가 자라던시골엔 집에 비상약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없었다. 늘 배앓이를 자주하고 설사를 자주하던 내겐 익모초가 약이었는데 개울가에 자라던 익모초를 우리 지방에선 육모차라 불렀다. 자주 아프니 당연히 익모초가 어떻게 생긴 것과 개울 어디에 있다는 것도 알았다.
배가 아프면 나 스스로가 익모초를 베다가 절구에 짖이겨서 장례 치른 후에 남은 삼베쪼가리에 담아서 한약을 짜듯 꾹 짜서 한사발을 들이켜야 했는데 그 맛이 정말 당시 우리 엄마의 표현을 빌자면 깅게락 같다는 아주 쓰디 쓴 맛이어서 그 쓴맛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다시는 아프지 말아야지 하지만 아픈게 어디 내 생각대로 되는가 말이다. 이 익모초가 난 배앓이에만 먹는 줄 알았는데 부인병에도 특효약이었다.
자궁병, 냉증, 대하증에 좋은 효과를 낸다. 내가 자랄때만 해도 배앓이와 더위 먹었을때만 익모초를 먹은 것 같다.
옥도정기 또는 일본어 아까징끼인 빨간약은 원래 요오드팅크(요오드를 알콜에 녹여 만든 소독약)을 일본식 한자발음으로 옥도정기라고 하고 일본어로는 아까징끼라 발음하기도 한다. 아까징끼라고 많이 썼던 것 같다. 이 빨간약조차 우리집엔 없었다.
아버지가 대한통운을 다니던 친구네 집에 가야 있었는데 사실 어려서는 그 집에서 밥 먹은 날도 많고 그 집 식구인지 우리집 식구인지 헷갈리게 그 집에서 자고 아침에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이 아까징끼가 까진 곳이나 낫이나 칼에 베인 곳에만 바르는게 아니고 거의 만병통치 수준이어서 삔곳에도 벌에 쏘인 곳에도 바르는 것이었다. 뽀록지가 나도 이걸 발랐으니 효과가 있던 없던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바르고 마음에 안심을 가지는 진정효과가 컸다고 할 수 있다.
나에겐 늘 따라다니던 가려움증이 있었는데 가려움에 바르는 약이 지금이야 많지만 어릴적엔 약이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가렵다고 하면 엄마가 부엌 아궁이 앞에 옷을 벗고 서게 하고 짚을 태워서 그 재로 온 몸을 쓸어주었는데 짚을 태운 재가 효과가 있기보단 기도하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두더지를 빨래줄에 걸어놓았다가 구워서 살만 발라주었는데 제사때가 아니면 고기 구경이라고는 못하던 때였으니 맛있을 수 밖에 없는 남의 살이었는데 요즘에 와서 두더지가 어디에 효능이 있고 내가 어디가 아팠던 것일까하고 찾아보니 정력과 보신에 좋단다. 한국 사람들은 정력에 좋다면 쥐도 다 잡아먹는다는데 두더지는 이미 자취를 감춘지 오래가 아닌가 한다.
우리들이 땅따먹기 놀이를 하면 오징어를 그려놓고 오징어 놀이나 돼지 거시기 방울이라고 부르는 놀이가 있었으니 밀고 밀어내는 싸움이었는데 그 와중에 확 잡아당긴 상대인 동네 형의 힘에 이끌려 그대로 머리를 뽀족한 돌에 부딪히게 되었다.
지금도 그 어릴적 영광의 상처가 남아있는데 이마 정가운데를 뽀족한 바위에 찔렸으니 피가 얼굴을 덮었다. 급한 애들이 집에 가서 혼자있던 누나를 데리고 왔는데 놀란 누나도 엉엉 울면서 손으로 이마 상처 부위를 잡고 300미터 정도 되는 거리를 오면서 누나의 흐느낌에 난 아픈 것도 알 수 없고 피를 적게 흘리려고 하늘을 쳐다보고 걷다보니 하늘에 새까맣게 몰려드는 까마귀 떼의 까악~ 까악~ 울어대는 소리에 이제 이렇게 가는가 보다 싶었다.
들에서 일하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엄마와 아버지도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 방에 누여놓고 뒷 뜰에 장독에서 된장을 떠다가 이마의 상처에 붙였다. 소금을 올린 상처처럼 그 아픔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지만 지혈엔 도움이 되었지만 계속 흐르는 피를 멈추지는 못했다.
아까징끼로 해결될 일이아니었다. 지금 같으면 바로 병원행이었을 상처였지만 약국 조차도 2키로미터는 떨어진 곳에 있던 터라 친구 집에 있던 오징어뼈를 급해 공수해 온 마을 사람들이 합동작전으로 오징어뼈를 갈아서 상처에 붙였다. 그리고 머리를 싸맸다. 그렇게 오징어뼈가 내 이마의 구멍을 매웠고 병원은 가지 못했다.
집안 여기저기 영양제며 감기약이 수북히 쌓인 것은 물론이고 병원 처방약도 먹지 않은 것이 여기저기 보이는 현실 앞에 오래전에 한국에서 호텔 다닐때 받은 약상자를 보면서 비상약속에 빨간약을 발견했다. 아까징끼. 옥도정기. 요오드팅크. 어린시절을 소환하기에 충분한 소재다.
요즘은 조금만 아파도 약을 먹고 병원을 손쉽게 갈 수 있어서 아주 먼 이야기나 아프리카 토인의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가 그런 어린시절을 딪고 지금까지 왔다.
구멍이 숭숭 뚫린 대충 엉성한 부엌에서 고무통(다라이)에 가마솥에서 데운 물을 붓고 누나가 물동이로 이고 온 물을 섞어 목욕을 하던 그 부엌에 이제는 돌아오지 못할 어머니의 손길이 내 온 몸 구석구석을 닦고 있었다. 가마솥에 밥을 하고 화로에 불을 담아 방에 가지고 들어가 보글보글 남비에 찌개를 끓이고 가끔씩 짚으로 온 몸을 쓸어 두드러기를 쫓기도 했던 날들이 달이 없는 날 뒷간에서 미끌어져 빠진 똥독에 간신히 걸려 더 이상 빠지지 않으려 소리 소리 지르던 그 날처럼 흑백 영화 필름 속 영화처럼 가끔은 지직대면서 변사의 말처럼 스쳐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