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서재창

 

캐나다에 처음 와서 이 사회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곰곰이 궁리 끝에 찾아간 곳이 ‘북쪽 해변 이웃센터 (North Shore Neighbourhood Volunteer Food Bank)’로 극빈자를 위한 자선단체였다. 나는 이곳에서 한 달에 3번 매주 수요일 9시부터 1시까지 거의 18년간 봉사하였다. 자원봉사자 12명 가운데 아시아인은 나 혼자뿐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영국 북아일랜드에서 이민 온 레이(Raymond)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분은 나보다 10살 위였다.
그는 젊은 시절 만능스포츠맨에 복싱챔피언에 합기도 선수 생활을 했으며 지금은 독신으로 살고 있다고 말하며. 스페인에서 패싸움에 가담하여 싸우다가 칼침을 맞아 왼쪽 팔을 잘 움직일 수 없다는 안타까운 말을 했다. 그리고는 장애연금으로 연명해 가고 있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외모는 키 180에 미남형 바바리코트를 좋아하고 욕심과 허세를 부르지 않고 베풀기를 잘하며, 무소유에 순수한 면의 영국 신사 같았다. 왠지 친밀감이 들고 편안한 인상을 느끼게 했다. 자원봉사자끼리는 한 가족으로 여긴다는 착한 마음과 신념을 지니고 있었기에 인연의 정을 맺도록 신뢰감을 주었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우연히 레이와 마주쳤고. 그가 사는 집으로 나를 초대했다. 독신자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혼자 살아서 그런지 방안에 살림 도구들이 여기저기 산만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왼쪽 팔을 쓰지 못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안타깝고 가련한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통조림 같은 캔 종류를 따는 일이라든가 옷을 입고 벗을 때 상당히 불편함을 느끼며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그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동정심이 생겨 작은 힘과 일손으로 도움을 주다 보니 레이와 자연히 가까워지고 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다. 이것도 하나의 봉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를 거의 매일 만나 그렇게 정을 나눈 지 어느새 4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가 나한테 너무 신세를 끼쳐 그 은혜의 조그만 보답으로 잘 아는 캐나다 재향군인회 클럽에 가서 술 한잔을 대접하겠다는 고마운 인사 요청이었다.  클럽에서  칵테일 맥주를 마시자 취기가 올라왔다. 레이와 헤어진 후 집에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자기 집으로 오라는 부탁이었다.
그의 집에 가서 보니 그는 적포도주 30도짜리를 마시며 술이 잔뜩 취해 정신을 잃을 정도로 취해 있었다. 나는 더 술을 마시면 안 되겠다는 판단 하에 그가 화장실을 간 사이에 술병을 몰래 다른 곳에 숨겨 두었다.  그랬더니 그는 버럭 화를 내면서 평소에 들어보지 못한 쌍스러운 말까지 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이제 그만 마셔요. 실망하지 말고 (No, more a drinking. Don’t be upset)”라고 했다. 그는 “ 닥쳐!  (Shut up! FFF……. guy)”라고 했다. 나는 다시 “레이! 진정해 (Ray! Calm down)”라고 말했지만 계속 내게 욕설을 퍼부었다.
참으로 서운하고 실망스러워 그와는 더 함께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안녕 빠이빠이. 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영원히 안녕히 될 줄이야 작별 후 그는 목욕탕에서 샤워하는 도중 비눗물 바닥에 미끄러져 뇌진탕으로 갑작스럽게 그만 사망하고 말았다.
그와 마지막 이별주가 아닌 사별 주가 될 줄은 꿈속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그 당시 나는 너무도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아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불행한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이 자리를 빌려 그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빌어본다.
문득 최희준 가수의 하숙생이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이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또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어디로. 한 줌의 흙이 되어 하늘나라로 우리 모두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그 길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시 한번 인생무상을 느끼게 한다. 레이는 세상으로 갔지만, 그가 남긴 깊은 인연의 정과 흔적은 내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문인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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