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름이 하늘을 껴 앉고 빙글빙글, 오방색을 두른 블루 마운틴 공원은 가을 내음으로 분주하다. 전 날까지 주룩주룩 내리던 비가 그치고 그지없이 맑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청, 홍 샅바를 두른 해오름 아이들의 즐거운 씨름판에 징 소리를 휘감은 신명이 넘실댄다.
늘 조용하고 멋쩍게 웃는 모습이 매력이던 애교덩이 종찬 샘의 첫 씨름 수업이 있던 날, 다부진 자세와 준비성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 씨름 선수용 반 바지와 청홍 샅바를 수줍게 꺼내던 순간을 나는 잊지 못한다. 코 끝부터 뒷덜미까지 후끈 달아오르는 그 무엇…, 평소 앳된 모습과는 달리 차분하게 씨름의 역사와 복장, 샅바 매고 잡는 법과 시합 방식 등을 설명하고 이어 씨름 동작을 선보였다.
씨름은 두 사람이 샅바를 맞잡고 힘과 기술을 이용해 상대를 넘어뜨려 승부를 겨루는 경기로 2018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 세계적으로도 역사적·문화적인 가치를 인정받은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이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통해 오랜 씨름의 흔적을 찾을 수 있고 고대 사회에서는 나라의 행사 때 씨름을 공연 형태로 선보이는가 하면, 나라의 장례 때에도 통과의식의 하나로 씨름을 베풀었다고 한다. 또한 씨름의 역동성을 가장 잘 나타낸 단원(檀園) 김홍도의 「씨름도」의 한 장면을 우리는 기억한다. 한민족 특유의 공동체 문화를 바탕으로 유구한 역사를 거쳐 현재까지 전승되어 온 민속놀이다.
오른쪽 다리로 상대편의 왼쪽 다리를 걸어 샅바를 당기며 상대편의 상체를 자기의 가슴과 어깨로 밀어 넘어뜨리는 안다리와, 상대편의 오른쪽 다리가 앞으로 나와 있거나 몸무게 중심이 오른쪽에 있을 때, 자신의 오른쪽 다리로 상대의 오른쪽 다리를 걸어 넘기는 밭다리로 한 판 씨름판을 벌렸다.
먼저 맏형 교사인 현수와 의젓한 청소년으로 자란 폴이 맞붙었다. 시합에 앞서 인사로 상대와 관중, 심판 등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무릎을 맞대어 앉았다.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샅바를 다부지게 부여잡고 서로 발로 툭툭 치며 맥을 짚는다. 두 사람이 팽팽하게 맞잡은 양손에 긴장감도 잠시, 오른 발 왼발을 앞 뒤로 밀고 당기며 상대방을 들어 올리려 힘을 모은다. 쉽사리 들리지 않는다. 다부진 폴의 안다리에 현수가 혀를 내민다. 으랏차차!! 현수의 기합에 폴이 들이는 듯하더니 이내 앞 뒤 걸음질로 제 자리를 잡아간다. 서로 엎치락뒤치락 하기를 수 차례, 힘에 부친 두 사람의 엉덩이가 자꾸 뒤로 빠진다. 붉게 달아오른 두 사람만큼이나 구경꾼의 열기는 더욱 뜨겁게 고조되는 순간 억! 왼쪽 다리를 걸려던 폴이 들렸다. 구경꾼인 폴 아버지의 손과 다리도 함께 들리고 마치 본인이 시합을 하는 것처럼 온 몸이 들썩인다. 다시 샅바를 고쳐 잡고 아버지의 응원에 힘을 모은 폴이 현수를 넘기는 순간, 박수가 터져 나온다. 손짓과 발짓으로 앉았다 일어서던 구경꾼의 몸짓으로 이미 씨름판은 두 사람의 시합이 아니라 모두를 시합으로 끌어안는다. 이어 형제와 부자, 친구와의 경기가 벌어지는 동안 싸움판인 줄 알고 강아지까지 으르렁 달려들 듯 합세하여 배꼽이 뒤로 붙고 허리가 휘어지도록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다.
오늘 씨름판에는 한라장사가 떴다. 종찬 샘의 아버지가 한라장사였다니 ㅎㅎ. 밴쿠버에서 씨름도 생소한데, 한라장사를 만날 수 있는 행운을 얻은 해오름 가족도 나처럼 지난 밤을 설쳤을까? 아들 종찬이와 해오름 가족을 격려하고 우리 민족 고유의 경기인 씨름을 직접 선보이고자 자리를 함께해주었다. 먼저 김영훈 사범의 태껸으로 몸을 풀고, 한라장사의 지도로 청홍 샅바 매는 법과 잡는 법을 다시 배우고 잘못 잡았을 경우 부상의 위험에 대한 주의를 들었다.
왼쪽 팔에 홍 샅바를 휘어 감은 윤문기 장사와 아들 종찬 샘의 시범은 모두의 손에 땀을 쥐게 했다. 힘을 거머쥔 긴장감도 잠시, 오른 발로 아들의 오른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넘어진 아들을 들고 빙빙 돌아 한라 장사의 위력을 한 눈에 보여주었다. 다시 왼발 걸기로 아버지의 다리를 걸려 다 들려버린 종찬 샘 부자에게 박수가 쏟아졌다. 장사와 한 판 승부에 도전한 아이들의 아버지는 놀이하는 아이처럼 장사의 손에 들려 빙글빙글 윗배가 드러나도록 돌고 한 번 더 버티기를 해 보지만 힘으로 되는 게 씨름이 아니다. ㅎㅎ 이번엔 아이들 차례다. 장사의 손에 샅바를 매는 영광을 안고 의기 롭게 도전해 보지만 쉽게 상대의 오른발 걸기에 걸려들고 만다. 마무리 몸풀기는 한창현 선생님과 따님의 장구 장단으로 탈춤이 이어졌다. 탈과 한삼의 날개 짓은블루 마운틴 하늘에 한국의 색을 입히고 장구장단은 풍경으로 퍼져 나갔다.
자원봉사 교사를 비롯한 모자와 부녀, 부자가 함께참여하여 해오름 가족들에게 심어 준 한국인의 멋과 맛과 인정, 사랑의 어울림, 밴쿠버의 참 아름다운 가을 풍경이었다. 모래판은 아니었지만 푸른 잔디에서 펼춰진 씨름과 태껸과 탈춤은 우리의 혼을 일깨우는 울림 한마당이었다.
울림 마당 한 켠에는 떡볶이와 오뎅꼬치, 겉절이, 김밥과 식혜가 아이들을 기다린다. 식어도 식지 않는 가족애와 은근과 끈기의 달큰한 한국애가 넘실거린다. 잊혀지지 않는 가을 풍경으로 오래 남을 으랏차차, 씨름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