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은 노자(老子)가 물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여겨서 전해 내려오는 단어이며 가장 위대한 선(善)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노자는 BC 6세기경에 활동한 중국 제자 백가 가운데하나인 도가(道家)의 창시자로 알려져있다.
이런 사람이 있을까? 흐르는 물을 보고 이러니 저러니 타박하고 분별하여 비판하는 우스꽝스런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바로 “나” 이다. 난 내맘을 갖고 나름대로 그렇게 살아 온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마음이란 것이 그냥 흐르는 물처럼 물결이 생기고 높은데서 낮은데로 흐르면서 평행을 이루어 여기저기 흐를 수 있는 곳은 모두 다 완전하게 채워가면서 흐르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마음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이 우주 즉 자연의 법칙대로 정직하고 솔직하게 표현된다는 것이고 마치 물이 완전하게 채워가면서 흐른다는 일과 같은 의미이다.
그런데 어떤가? 그냥 ‘보이고 느끼고’에 대한 더 이상의 뭔가 설명과 포장이 붙여지지 않은 그걸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것이다. 급기야 아주 자동적으로 익숙해져 있는 ‘좋다, 나쁘다’ 의 이분법으로 인하여 설정과 기대를 하게되고 그것으로 분별과 판단은 기본요소로 행해지고 있으며 이 설정과 기대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피폐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도록 만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딘가에 방점을 찍어버린다.
이런 느낌 생각 등이 바로 “나” 혹은 “나의 삶” 이라고 연역된다. 그것으로 인하여 착한 사람, 나쁜 사람, 더 나아가 나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 해악이 되는 사람, 옳은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되어지고 마음이 정해지면 행동하게 되면서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계산을 하고 살고 이것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길을 찾아서 그곳에서 벗어난 삶을 살고 있는사람은 천에 하나만에 둘이 있을까 말까 하다는 것이다. 특히 이런 깨달음은 어떤 특정한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다는 잘못된 선입견에 의한 아쉬움도 있기에 자신의 삶에서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과 내가 태어날때부터 갖고 태어난 나의 본성이란 걸 갖고 태어났다고 하니 없는데서 만들어서 있게 하라는 것도 아니고, 있다고 하니 그걸 한번 확인하고 싶은 발심을 내어봐야하지 않겠는가? 하는 이 말을 글로 옮겨본다.

발심이 되지 않고 그 깨달음이란 것에 대한 체험이 없었을때의 나의 “삶”이란 것은 어떠했을까? 분별과 비판, 그것이 꿈과 희망이라는 긍정마인드의 허울 좋은 포장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고 설정과 기대는 무너져 원망과 불평으로 치달을 때를 우리는 갈등이다, 고통스럽다, 번뇌이다, 하고이름붙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이 당연히 ” 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거기서 벗어나려고 이 방법 저 방법 쓰면서 찾아다니는 그 자체도 “나”는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 “참나”라는 것을 찾아나선다. 하지만 그 “참나” 라는 어떤 이름 지어붙인 어떤 모습의 “참나”라는 것은 애초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지도 않은 참 ‘나’라는 것을 찾아야한다고 애를 쓰고 자신 스스로 만들어서갈등이나 번뇌에서 벗어나야한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그야말로 ‘자승자박(自繩自縛)’인 셈이다. 그러기에거기서 벗어나려고 하는 일이 밖에서 찾지말고 자신안에서 찾아야한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고 마음을 없애야한다느니 마음을 좋은 쪽으로 먹고 편안해져야한다고 하지만 본시 마음이란 것은 들여다 볼 마음이 없다. 또한 없앨 마음도 없다. 다만 내가 있고 내 것이 있기 때문에 그들과의 전쟁의 삶은 불가피하게 되어
버린것이다.

그 벗어나려고 하는 일이 자신의 단점이나 열등의식을 들춰내어 의기소침하거나 자괴감에 빠지거나 하고 아니면 난 이렇게 노력하고 있고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은 상대를 볼때면 비판과 원망의 눈길로 바라보거나 주위의 환경을 비난하지만 이 모두는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뿐만아니라 괴롭고 고통스럽다고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가 이름지어 놓은 고통이니, 번뇌니, 하는 이러한 마음에서 더 이상 물러남없이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먼저 내가 생각하고 이름 붙인 말은 말일뿐이고 그의 미를 못 박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말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해서 어떤 약속으로 정해놓고 사용할 뿐이다. 특히 ‘나’ 라는 존재도 마찬가지다. 이럴때 ‘나’는 진짜 ‘나’이고 또 그렇지 않을 때는 내가 아니고 싶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해석을 붙이고 감정이 포개지면서 생긴 착각내지는 망상일 뿐이지 번뇌에서 벗어나는 병을 치료하는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서 핀트가 맞지 않으면 목숨 걸고 투쟁을 한다. 내가 맞는다고 이게 ‘나’라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는 이 세상 모든 일은 모든 일은 마음에 달려있다. 마음으로 지어진다는 뜻이다.
이미 주어진 그 마음은 누가 손을 대서 바뀌고 달라지는 그런 마음이 아니다. 그 마음을 본성이라고 했다. 기독교에서는 God의 뜻으로, 불교에서는 경전에서 깨달음, 해탈, 도, 라고도 말을 한다. 이 모두는 대상이 아니고 또 다른 어떤 경지에 도달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부처라고 하는 것도 인도의 석가모니를 칭하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이름도 스스로 있는 자라고 했듯이 부처도 깨달은 자라는 뜻일 뿐이다. 그러기에 그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한마음일진데 우리는 본성을 확인하는 체험이 없었기에 분별하고 차별하여 내안에서 일어나 는오감(五感) 즉 생각으로 인하여 끝도 없는 허상을 쫒아서 착하게 살아야 한다느니 믿음을갖고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아야 구원을 받는다느니 하는 확신도 없는 관념으로 어느날 이루어질거라는 막연한 희망으로 치닫게 하지는 말아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현실적인 일의 분별없이 살아야한다는 말은 아니다.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쉬고 돈이 필요하면 돈을 벌고…. 그럴 뿐이라는 것이고 오늘 일은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는것일 뿐…

본성(本性), 깨달음
본성은 선행을 하고 수행을 해서 되는 일은 아닌것 같다. 그렇다고 착하게 살지말고 선행을 하는 일이 살아가는데 필요치 않아서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체험을 하고 나면 저절로 마음이 알아서 필요하면행해질 수 밖에 없는 삶이 살아질 뿐인것이다. 한번은 생각의 앞뒤가 ‘뚝’ 끊어지는 체험이 있어야한다. 어떻게는 없다. 굳이 방법이라고 말을 하자면 발심을 내어 먼저 경험한 선지식의 성경이나 경전을 토대로 한법문을 듣는 일이고 그것은 지식이나 방법을 익힌다는가 하는 일은 아니고 지금까지 살면서 갖고 있는 생각이나, 정보, 지식, 하물며 성경이나 경전의 머리로 아는 지식까지도 하나씩 버려져 가야한다는 일이며 그렇게 한가지씩 버려짐으로써 어느날 그 공부 즉, 법문을 듣다가 문득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에는 내가 우수하고 위대하다고 말을 할수 없는 일인것이, 곧 내가 뭘하고, 노력한 일이 없기 때문에 성경에 ‘그날은 도둑처럼 올것이다’라는 말이 실감이 나면서 더이상 물러남 없는 불퇴전의 지휘아래 삶이 영위 될수 있기에더 이상 청원이 무색해지고 기도라고 굳이한다면 “고맙습니다” 이것 뿐이다. 그러기에 발심만 가진다면 누구든지 가능한 일이다. 어떤 특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본성이란 것이 세상에서보는 가치기준과 달리 살아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나 이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단지 내마음에 일어나는그 일 하나하나가 이 본성으로 드러남을 확인시켜줄뿐이며 그 체험후에는 사랑도 선행도 성냄도 그냥 왔다사라지는 일일뿐이며 오로지 더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것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행해짐을 알아차릴 수는 있지만 자신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상선약수의 물 흐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