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 삶으로 반영될 때 제일 먼저 겪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 있을까?
주장이 있을 수 있고 그 주장에 대한 거절의 두려움이 있다. 이런 일에 있어서, 어떤 일을 시작하여 잘잘못의 평가가 뒤따르고 옳고 그름과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하는 마음 쓰임이 있다. 특히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소신보다는 남들이 옳다고 여겨주는지에 대한 일이 더 크게 역할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유한한 인간이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모두가 생멸로 인한 생겼다 사라지는 일임을 머리로는 잘 알고는 있지만 그 유한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영원함을 추구하면서 거기에 집착하게 되고 나쁘다고 여겨지는 일은 벗어나려 하며 좋은 일이라고 여겨지는 일은 머물고 싶어한다. 내가 유투브를 시작하고 영상이 80여개가 업로드되어 올려지고 있는 이때, 한국말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지구촌 곳곳에서 이용되어 지고 있다. 긍정의 아이콘들도 만나지만, 비판으로 자신들과는 다른 방향이라고 비난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그런 비판의 목소리를 들을 때와 내가 제공한 일에 대한 거절의 메세지를 접할 때면 , 부끄럽고 숨고 싶었으며 상대가 나에게 던진 그 말은 생겼다 사라지는 그 사람들의 생각뿐일진데 이런 일을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 엄습해오는 거절의 두려움과 나 자신에 대한 비난에 먼저 태클이 걸리게 된다. “난 뭘 위해 이런 일을 하고 있지? “그리고 항변하고 싶은 주장에 나 혼자서 날을 세우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 친구에게 속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 친구의 말이 더 이상의 수렁으로 빠지지 않게 붙들어 주었다. 자기는 이런 일 하지 않아도 인간관계에서 숱하게 겪고 있는 일이라고 말해주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유한성을 지니고 이렇게 저렇게 나타날뿐인데 거기에다 영원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성과를 바라게 되고, 자랑하고 싶고 ,인정받는 일에 편승도 하게 되고 ….이름하여” 나” 라는 개체의 주장이라는 것이 있었더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옳다는 것도 모두 다 옳다고 할 수도 없고 다수의 지지가 다 옳은 것도 아닐진데 그 힘의 편승에 자신을 맡겨 버릴때 갈등은 친구 하자고 나를 부추긴다. 요즘 나의 칼럼 쓰는 일이나 유투브 영상 올리는 일은 구독자수와 조회수에 마음이 쓰일 때가 있다. 구독자수가 얼마나 많으면 만족할 만큼 성취되었다고 하겠으며, 잘되어 간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거기에는 유한한 “나”라는 존재가 원하는 카테고리가 설정되면서 그 유한성을 벗어나서 영원하기를 바라는 나의 망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영원함을 추구하는 일이라면 끝내 만족이라는 동네는 환상의 유토피아가 될 뿐이며, 설령, 많은 사람들이 잘한다고 칭찬해주고 나의 콘텐츠에 관심을 가지고 영상을 보면서 도움이 되었다 한들 , 그것 뿐이지 않겠는가? 그 일로 인하여 잘 한다고 한들 그것이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일도 아니며 그야말로 그것 뿐이라는 것이다. 더 이상의 나 스스로 다른 말을 듣고 싶어 한다면 그건 사족(뱀의 다리)일 뿐이다.

어린시절 아버지께서 내가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도 모르시면서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느 무리 속에서든지, 충신이 50명이 있으면 , 역적도 50명이 있기 마련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다.나의 글이나 영상을 내보내면서 많은 사람이 지지하고 잘한다고 칭찬해 주는 일을 기대한다면 큰 망상에 젖어 있다고 하겠지만 , 아마도 난 그런 착각에 한 동안 빠져있었구나 싶다. 그것은 거절의 돌멩이가 날아 오면서 정신이 번쩍 들게 되면서 그 안에는 나의 말이 옳고 잘 한다는
그 달달함을 빨아먹고 살고 싶다는 욕망이, 망상이 바벨탑을 쌓고 있었다. 그러면서 유아적인 감상과 기대를 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아! 이번에도 이 시간들은 흘러가고 있고 아니 이미 지나갔고,내 키가 쪼끔, 커겠구나 싶으면서 “공부 중” 이라는 등이 켜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나의 생존의 확인이자 받아 들여짐이고 숙연해지는 나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인하여 모든 사람의 지지를 받을 수는 없다는 것과 거기에 굳이 나의 주장을 내세울 필요성도 느끼지 않게 된다.

난 이 일을 여건이 허락한다면 계속 할것이다.
묵묵히 나의 이 일을 해 나가다 보면 “나” 와”너” 가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한데 녹아나는 일을 맛보게 될 수 있고 “나”라는 것이 곧장 사라짐을 감지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 어떤 일에 뛰어난 재능과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으로 주위의 반응에 의식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 일로 인하여 날아오는 돌멩이가 큰 아픔으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 같다. 어떤 일이라도 버리려고도 하지 않고
붙잡거나 머물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일들은 분별함 없이도 사라지고 흘러가기 마련인 것이다. 다만 분별하는 이 중생의 병이 낫기만 한다면….

2천년전 이 중생의 분별과 생각이 병 이라고 외치다 다수의 폭력에 희생양이 된 예수라는 사람이 있었다. 오늘날에 있어, 그 다수는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