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실듯한 금발, 카리브 해 심연처럼 푸른 눈동자. 틀림없이 그녀였다.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영화 속에 있었다. ‘피서지에서 생긴 일’에서 샌드라 디를 처음 본 트로이 도너휴였다. 수십 년 전 기억이 왜 이제서야 떠오르는지. 그건 분명 영화음악 때문이었다.
 
래돈도 해변에 아주 아름답고 가격도 적당한 카페가 하나 나왔다고 해서 가 본 것이 2002년 여름. 제2의 인생을 LA, 시애틀, 시카고, 또는 캐나다 밴쿠버 중 어디에서 보낼 것인가 확정하지 못한 때였다. IMF 때 다니던 은행이 다른 은행에 통폐합되고, 고소득 상위간부부터 구조조정을 할 때 내 제1의 인생은 끝나버렸다.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을 보내면서 대학에서 풀타임 외래교수로 힘든 세월을 지우려 애썼다. 그러나 남은 인생을 지레 포기하기에는 내 피가 아직 뜨거웠다. 가자. 이 세상(한국)에서 더 볼 일 없으면 저 세상(외국)에서 새로 시작하자. 그래서 LA에 현지답사를 갔던 것이다.
 
E2 사업비자를 신청하기 위해 적당한 가게를 물색하던 참이었다. 평생을 월급쟁이로 살아서 사업경험이 없고, 영어도 신통찮으니 너무 규모가 큰 가게 말고 한 10만 불 정도의 작은 가게를 알아봐 달라고 했다. 그로서리는 너무 힘이 들고, 세탁소도 적성에 맞지 않고, 이런저런 조건을 달다 보니 부동산 중개업자가 추천한 것이 커피, 도넛, 가벼운 식사 등을 파는 카페였다. 서너 군데를 둘러 보다가 마지막에 온 것이 래돈도 해변의 작은 카페였다.
 
3층인지, 4층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1층에는 이런저런 점포들이 있고 2층부터는 아파트형 주거지가 있는 주상복합 건물이었다. 카페 입구에는 온통 꽃으로 장식되어 있고, 실내에는 대여섯 개의 테이블이 정갈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예쁜 가게라는 생각이 들어 연신 사진을 찍어 대는데 부동산중개업자는 사진을 그만 찍으라고 했다. 지금 일하고 있는 종업원이 알면 가게가 팔리는 줄 알고 실망해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제서야 금전등록기 옆의 종업원을 힐끗 쳐다보았다.
 
눈이 부실듯한 금발, 카리브 해 심연처럼 푸른 눈동자. 청순하게 생긴 여종업원이 나를 향해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다.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여름방학 중에 아르바이트를 나왔다는 그녀는 열일고여덟 정도 되어 보였다. 그런 여자를 내가 어디에서 볼 수 있단 말인가? 한국에서 만났던 영어회화 강사나, 30대 초반에 뉴욕에서 금융기관 중간간부 연수를 받았을 때 만났던 여자들을 떠올려 보았으나 그녀들은 10대일 수 없었다. 혹 어머니나 이모 중에? 하면서 다시 생각해 보았지만 비슷한 여자도 없었다.
그때 ‘라, 라라라라, 라라라라—‘하는 멜로디의 음악이 카페 안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피서지에서 생긴 일’ 의 영화음악이었다. 샌드라 디! 나는 금방 카페 여종업원의 얼굴에서 샌드라 디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 미지에 대한 아련한 꿈이 드높은 창공을 나르던 10대에 본 영화. 결혼 전에 서로의 아들(트로이 도너휴 분), 딸(샌드라 디)을 소개하러 피서지인 해변에 왔다가 그만 부모에 앞서 자식들이 서로 사랑하게 되고, 영화로 인해 당시 신조어가 된 ‘바캉스 베이비’를 가지게 된  젊은 연인들의 부모는 자식들을 위해 그들의 사랑을 희생하는 내용의 영화.
 
코리아타운의 민박집에 돌아와서도 나는 그녀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중개업자에게 만약 내가 그 가게를 인수한다면 그녀를 해고하지 않고 그대로 채용하겠다고 했다.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 있다’고 나는 어쩌면 그녀와, 아니 내 10대의 아련한 추억과 함께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거래는 성사되지 않았다. 래돈도 해변의 서양식 카페는 동양인이 주인이 되면 손님이 발길을 돌릴 거라고 했다. 사업이 잘되지 않으면 E2 비자로 영주권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사업에 썩 자신이 없었다. 신은 하나의 문을 다으면 다른 문을 열어 주신다고 했던가. 천안에 있는 모 중소기업의 해외지사 설립기회가 내게 주어졌었다. 은퇴 후의 내 삶도 덤으로 고려했다. 해서 뉴욕, 시카고, 시애틀, LA, 밴쿠버를 순회하며 지사설립지역을 물색함과 동시에 독자적 사업기회도 엿보았다. 그 결과 사업이 부진하면 철수해햐 하는 미국보다, 조건부이기는 하지만 영주권부터 먼저 주는 캐나다 밴쿠버를 내 제2의 삶의 터전으로 정했다. 
 
2014년 4월. LA의 코리아타운에서 ‘한미청하문학회’ 행사가 있었다. 아내와 나는 행사 참석후 래돈도 해변을 찾았다. 국제전화로 당장 계약하겠다던 그 카페를 아내에게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가끔 꿈속에서 나타나던 그 카페는 종래 찾을 수 없었다. 래돈도 해변(Redondo Beach)과 퇴역군인기념공원(Veterans Park)을 표시하는 구조물이 있는 작은 공원이 기억나서 그 주변을 몇 번 돌았지만, 어디에도 그 카페는 보이지 않았다. 10여 년 세월의 흐름 속에 기억은 망각으로 변했다. 아름다운 추억도, 슬픈 기억도 이제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늙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기회가 되면 다시 래돈도를 찾을 생각이다. 아마 그때쯤이면 ‘샌드라 디’의 추억은 사라지고, 아내와 함께 손잡고 거닐던 해변의 추억은 부활할 것이다. 사람이 다가가도 꿈쩍 않던 한 쌍의 펠리컨도 여전히 우리 부부를 예전처럼 변함없이 심드렁하게 맞이해 줄 것이다.
 
**글쓴이 | 이원배 
시인, 수필가. 캐나다 한국문협 이사장, 시집 ‘이방인 향단이(2000년). 2016년 해외한국수필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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