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 말하는 트라우마는 신체적인 손상과 생명의 위협을 받은 사고에서 심적외상을 받은 뒤에 나타나는 질환이다라고 위키백과에서는 말하고 있다.
충격적 상황 후 스트레스 장애,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  외상 후 증후군,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트라우마 등으로 불려진다.  주로 일상생활에서 경험 할 수 없는 특별한 사건들.  이를 테면 지난 번에 있었던 제천 화재사건 같은 사건이나 세월호 참사 같은 천재지변,  화재,  전재,  신체적 폭행 ,  고문,  강간,  성폭행,  인질사건,  소아학대,  자동차,  비행기,  기차,  선박 등에 의한 사고.  그 밖에 대형사고 등을 겪은 뒤에 발생한다.
증상이 나타나는 시기는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충격 후 바로 시작 될수도 있고 수개월 혹 은수 년이 지나서 나타나기도 한다. 증상이 1개월 이상 지속되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하고 한달 안에 증상이 일어나고 지속기간이  3개월 미만일경우 급성 스트레스 장애에 속한다.
증상이 나타나는 시기는 과민반응을 하거나 비슷한 상황에 처해졌을때 부들부들 떨거나 그 순간의 기억을 잊으려 한다. 꿈이나 기억 등이 재차 반복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심한 편두통이 일어나거나 소화가 되지 않아 고생하기도 하고 두드러기 등 알러지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에서 도망치기 위해 진통제나 술 등에 의존하는 횟수가 많아 중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심하면 발작을 일으키는 공황장애를 나타내기도 한다.
 
Mental Health First Aid
즉 정신병자 응급 처치자격증을 공부하면서 선생님과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공감한 적이 있다. 한국에선 정신병자를 만드는 드라마를 많이 보게 된다.  그리고 정신병자에 대한 인식이나 선입견이 좋지 않다.  누구나가 앓을 수 있는 병임에도 가족 중에 누군가가 그런 환자가 있으면 숨기려한다.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다 나았다고 해도 사회에서 싸늘한 눈초리로 바라보기 때문에 사회생활이 힘들기도 하다.  그럼에도 현대사회의 복작함과 많은 교통사고 등의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음에도 회피하려고 하지 도와주려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 날은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아주 억수 같이 내리는 빗소리가 창문도 없는 골방인 웃방에서 자면서도 들을 수 있었으니까 .잠을 자다 무언가 소리에 의해 잠을 깼다.  동생이 옆에서 자고 있었다.  보통은 문을 열고 내다 봤을테지만 느낌이 싸해서 창호지에 침을 발라 구멍을 내고 내다봤다.
어떤 남자가 런닝셔츠와 팬티만 입은 아버지 팔을 문지방에 올려 놓고 꺽고 있었다. 이미 비를 맞아 초췌해진 아버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신음소리만 내며 당하고 있었다. 내가 나가서 도와줘야한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손도 얼고 발도 얼어 붙은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몰려 온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난 지옥에서 아버지가 당하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내가 싫었다.
아침이 되고 사람들이 몰려와서야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됐다.
뒤뜰에 도라지꽃이 엉망으로 쓰러져 있는 것이 지난 밤을 말해줬다. 엄마와 어버지가 병원에 실려가고 누나는 다른 동네 아는 집에 피신해 있었다. 나와 내 동생을 돌보기 위해 할머니가 작은집에서 오셨다. 반가운 마음에 할머니가 물 길으러간 두레박 샘터를 따라가니 할머니가 다른 동네 아줌마들한테 말했다. “ 우리 애들은 안 그런데 얘들은 왜 그런지 이리 귀찮게 졸졸 따라다녀유.”  여기서 말 한 우리애들은 작은 집사촌이고 얘들은 나와 동생이었다.
서운한 마음에 엄마가 있는 병원을 학교 끝나고  10리를 걸어서 갔다. 엄마 목에 목을 조른 상처와 아버지 온 몸에 타박상이 지난 밤일을 유추하게 해 주었지만 엄만 지난밤을 이야기 해줬다. 아버지는 상가집에 갔다가 술이 취해 늦게 들어오셨고 초저녁 잠이 많았던 엄마는 잠들었다가 요강을 비우기 위해 뒤뜰에 나갔다. 
이상한 소리가 나서 옆집싸리 나무 울타리가 있는 곳으로 갔다. 옆집의 천이 아버지가 할머니를 구타하는 장면을 목격한 엄마는 어머니한테 그러면 되느냐고 했다고 한다.  “넌 뭐야 시발.” 하면서 마치 말 달리 듯 달려 온천이 아버지는 엄마를 쓰러트리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목 조르는 것이 좀 느슨할 때 소리를 지른 걸 듣고 술 취한 아버지가 나갔고 천이 아버지는 목을 조르던 엄마를 두고 아버지한테 달려들어 구타를 하기 시작했다.
천이 아버지가 태권유단자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방까지 도망친 아버지를 쫒아와서 문짐방에 팔을 꺽고 있던 장면이 내가 본 장면이다.  그리고 엄마는 맨발로 웃집으로 달려가서 도움을 요청했다.  이웃들이 다들 모여들기 시작하고 경찰이 아침에 와서 잡아가긴 했지만 청주 지방법원에 아는 사람이 있다던 천이 아버지는 금방 풀려났다. 누나는 그 상황에 놀라서 도망가서 아는 사람 집에 있다가 트라우마가 심해서 세브란스병원에 가게 된다. 합의하고 나서의 일이라 우리집에서 아주 중요한 재산 중에 하나였던 논을 팔아서 서울 병원비를 내야 했다. 그때만 해도 어린 나는 아무렇지도 않고 담담했다. 창호지 구멍을 통해서 본 그 충격적 장면에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 상황에 대한 죄책감만 밀려왔다.
그리고 그 죄책감은 나중에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이 되었다.
농약병을 들고 죽겠다던 아버지의 행동도 한두번이 아니었고 그렇게 우리 가족을 풍비 박살 낸 천이 아버지는 나중에 동네 이장이 됐다.  우린 누나가 집에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서 갑자기 정든 집을 버려두고 신작로 옆방앗간 옆집으로 이사를 했다.
행정 구역상 같은 동네이긴 해도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그렇게 내가 나고 자라던 정든 집에 내가 심은 대추가 열리지 못한 채 떠났는데 다음해에 대추가가지가 늘어질 정도로 달렸다. 오래된 호두나무는 늙어서 호두도 달리지 못하고 삶을 다하고 있었다.
그 후에도 이사한 동네에 이발소에 이발하러 갔다가 부부가 싸우면서 아내의 목에 낫으로 긋고 농약을 마신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목에서 콸콸 쏟아지는 피와 농약을 마시고 괴로워하던 그 남편은 결국 사망했고 아내는 수술하고 살았다. 버스를 타고가다 끔직한 교통사고로 두개골이 터져 벽으로 튀는 장면을 버스 안에서 목격하기도 했다.
그리고 살면서 내가 뭔가를 해야 할 순간이 오면 늘 몸이 먼저 굳어버렸다. 무력감이 밀려오고 급기야 20대엔 우울증이 심해져서 정신과심리치료를 하다보니 오래 전의 트라우마로 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의사는 가슴에 쌓여있을 뿐 기억에서 지우려 노력했을 뿐 아직도 그 상황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당시엔 씩씩하고 담담해 보였지만 혼자병을 키우고 있었다고 . 
삼풍백화점 사고가 있던 때도 내가 그 곳에 5층 수영장에 근무하면서 날마다 보던 회장의 얼굴과 그 아들사장의 얼굴 그리고 함께 일하던 동료들의 얼굴이 교차되었다. 이미 그만 둔 상태였지만 내가 그 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가면 속에 얼굴을 본 것 같았다.
나중에도 고향집에 가서 밭에 일하는 엄마를 보러 가다 천이 아버지와 마주치고 주먹에 힘이 들어갈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내게 “언제 내려왔니.” 하고 물었지만 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는 나중에 그 집에 품앗이일도 하고 왕래를 하곤 했지만 난 절대 그를 용서 할 수 없었다.
 전재민 칼럼facebook_밴쿠버 교육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