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과 무관심은 분노와 많은 상관 관계가 있다. 지나친 관심은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피곤이 쌓이면 분노를 일으킨다. 사실 관심으로 끝난다면 분노로 이어 지지는 않지만 관심은 기대를 낳게 되어 있다. 우리가 어렸을때 장래 희망을 말해 보라고 하던 선생님의 말에 대통령부터 선생님, 공무원, 회사원 등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었던 멋진 모습들이 우리의 관심을 끌고 기대를 안겨주었고 그 기대는 희망을 안겨 주었다. 희망의 불씨는 미래를 꿈꾸게 했다. 하지만 살아 가면서 공부를 못해서, 노력을 해도 안되서, 가정형편 때문에, 지방에 살아서 등등 여러가지 이유로 그 희망은 그저 여름날 낮잠에 잠시 꾼 꿈처럼 우리의 희망에서 멀어져 갔고 우리의 기대에서 멀어져 갔다.
그리고 좀 더 현실적인 기대를 하게 되고 남들이 다하는 현실적인 것들 즉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평범한 일상을 꿈꾸게 된다.
하지만 그 평범한 일상조차도 점점 희망과 기대에서 멀어져 가는 현실이 된 것은 각박한 사회때문만은 아닐까 한다. 캐나다에 처음 이민올 때는 기대와 꿈을 안고 왔지만 현실은 기대와 많이 달랐다. 영어를 못하는 나의 현실과 직장이 나를 기다려 줄 것이라는 기대는 밴쿠버 선과 프로빈스 구인란을 보고 수십통의 이력서를 우편과 팩스로 보내도 아무런 답장도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민자금을 가지고 온 것도 없고 나만 바라보던 어린 아이들과 아이들을 돌보던 아내가 있다는 현실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누군가가 도와주었으면 하는 기대가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이민사회는 그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도 이웃에게 부탁하여 조그만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찾아 온 친구가 먼저 취직을 하고 그 친구의 도움으로 한국식당에서 일하면서 한국에서 특급호텔에서 일을 했는데 한국에서 당신이 무엇을 했던 잊어라 면서 이런저런 궂은 일을 시킬때 이러려고 이민을 왔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자괴감에만 빠질 수 없는 것은 가족을 지키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킬 것이 있다는 것은 책임감과 더불어 희망에 대한 기대였다. 나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그것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 온 행운처럼 캐네디언 회사에 입사를 하고 회의 시간에 반도 못 알아 듣는 영어 실력과 입이 있어도 말도 못하는 반벙어리 같던 시절, 분명 억울하고 정상이 아니라고 느꼈을 때 분노가 싹이 트고 분노를 표출하지 못해 눈물이 주루륵 흐르기도 했다. 우리는 때로 주먹으로 때려 주고 싶은 욕구를 풀지 못해 울 때가 있다. 억울함일 수도 있고, 화를 주체하지 못해서 눈물이 쏟아 질 수도 있다.
힘들게 일해도 일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늘 가난하고 가지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할 때 욕구에 대한 충족을 이루지 못해 화가 나기도 한다. 모든 욕심을 내려 놓으라고 하지만 사실 내려 놓을 것도 없는 사람들이 쓰지 못하는 물건들을 챙겨 두는 습관이 있다. 돈을 주고 사지 못하니 언젠가 필요할거라 생각하고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관심을 꺼버리면 정말 좋겠지만 우리가 사는 사회는 홀로 사는 사회가 아닌 함께하는 사회속에 살고 있고 사회에서 늘 남들과 비교하게 되고 자책하고 그것은 화를 부른다. 남들은 나보다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아도 문제없이 회사를 잘만 다니는데 왜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나에게 거듭 실직이 이어지고 아파서 또 직장을 잃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 화가 난다. 그만하길 다행이야, 그래도 일을 할 수 있어 다행이야 하는 마음은 작고 왜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지 하는 의구심은 분노가 된다.
한국에서는 직장에 누군가가 병원에 입원하면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병문안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캐나다 직장에서 병문안을 온 적은 한 번도 없다. 오래전 카라 기내식회사에 일할때만 해도 한 달에 한 번 동료들이 모여 밥을 먹고 술도 마시고 친목을 다졌다. 하지만 다른 직장에서는 아무도 찾아 오지 않는다. 한국에서 일하다 손가락을 많이 베어서 을지병원에 간 적이 있다. 직장 동료이자 내 손을 다치게 한 선임 조리사는 과장으로부터 “니가 포스트 쿡이냐며 후라이팬으로 머리를 맞았다.” 하지만 그는 병원에 따라와서 마취도 안된 상태에서 손가락을 꿰메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맹장수술을 하게 되었을 때도 추석때라 많이 바쁜 프라자호텔 철도사업부임에도 직장동료들이 부천에 입원한 나를 찾아 왔었다. 정작 시골엔 걱정할까봐 아무도 안왔지만 직장 동료들이 자주 들리니 마음이 흐믓했었다. 하지만 캐나다 와서는 산우회 동료들만 다녀갔을 뿐이다. 직장에서 아무도 병문안 오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3주후에 레이오프한다고 연락이 왔다. 많이 서운했다. 기대한 탓이다.
한국에서 동료애를 캐나다에서 기대한 탓이다. 물론 개중에는 직장동료들이 친하게 잘 지내는 직장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의 경험으로는 캐나다에서 직장 동료애를 기대하는 것은 힘들다. 물론 직장에 대한 충성심도 기대하는 것은 힘들다. 철저하게 임금관계로 맺어진 관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