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그 시대엔 그렇게 사는 것이 숙명 인줄 알았습니다
그 시절에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생선 몸통은 어린 아들 주고
당신은 생선 머리나 무우를
먹는 것을 당연하다 여겼습니다

그 때는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했습니다

한번도 엄마가 이쁘게 치장하고 나가는 걸 본 기억이 없다
집에는 그 흔한 구루무 한 통 립스틱 하나 없었다
내가 어렸을 때도 어머닌 치아가 없어
찬물에 말은 밥에 김치 쭉 찍어 얹어 우물우물 넘겼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밭에서 쪼그려 앉아 김매고
청솔가지 연기가 매캐하게 그을은 부엌에서
산등성이 땔감 하러 다니느라 일찍 보낸 자식 애창 자리를 알려주던 산에서
열무 뽑아 개울에서 하얗게 뿌리를 씻어 함지박에 담아 버스 타던 뒷모습

아침 새참 점심 새참 저녁 하루 다섯 끼 이고 지고 논으로 오던 어머니
호미에 찍힌 감자 개울가 독에 담아두고 물을 갈아 전분 가루 만들고
고추 따다 연탄가스에 숨 막힐 듯한 광에서 고추 말리고
골짜기에 베어 세워둔 들깨, 참깨 털어서 오던
늘 고단한 나날이었다

새 옷은 장롱에 고이 간직하고
꽃 가라 몸뻬에 시장에서 산 이름 없는 자켓을 입고
수건을 두른 머리에 부엌처럼 새까맣게 햇살에 그을 은 얼굴

아들 장가 들면 좀 나으려 나 싶었지만
결혼하고 서울 살던 큰 아들 캐나다로 떠나고
평생 식구들 끼니 챙기시다 가셨다

그곳에선 편히 쉬고 이쁘게 화장도 하시길.

하늘에서 보고 있을 부모님

이젠 지식들한테 선물 받고
자식들한테 카네이션 받을 나이
그래도 친구처럼 함께 살고 있는 게 어디냐고
이역만리 떠나 얼굴도 못 보던 나의 부모님.

이미 세상을 떠난 지도 오래 건만 해마다 돌아오는 어버이날이면
카네이션을 받은 사람들, 자식에게 선물을 받은 사람들, 효도 관광을 떠나는
사람들 여러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돌아 가신 부모님을 캐나다 한 번 구경
시켜 드리지도 못한 못난 아들이구나 하는 생각만 듭니다.

한국에 살 때도 직장이 명절 때마다 근무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다른 동네
아들은 다 오는데 넌 못 오나 하던 부모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고 이민
온 뒤에야 한국에서도 버스 타거나 기차 타면 내려갈 고향을 비행기를 타야
하니 더욱 자주 못 찾아 뵙게 되었고 어머니가 돌아 가셨을 때도 형편 상 갈
수 없어 마지막 가는 길에는 가보지도 못한 안타까운 마음이 어버이날이
해마다 다가오고 다른 부모들 모습에 거울처럼 나의 모습을 비춰 봅니다.

이제는 하고 싶어도 할 수없는 아들 노릇과
이제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부모님 생각에
주름이 자글자글 하고 볼품없는 시골 할머니 그 모습이지만
신문에 한번 얼굴을 실어 드리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십시오.
사랑 표현은 많이 해도 부족합니다 하는 말들을 듣고도
마음속으로만 사랑한다 말하고 표현을 잘 못했던 것이 후회되기도 합니다.
전화를 하면 할 말이 없어 빨리 끊게 되던 그 순간들이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