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만큼이라는 단어는 단독으로 쓰기는 충분한 단어는 아니다. 충분한 단어가 아니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왜 그런 단어를 선택했을까?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그 단어가 가지는 폭넓은 뜻을 선택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내가 이제 늙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요만큼이라는 말은 아주 애매하다. 혹 손가락으로 보여주면서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보는 사람은 그 사람에 따라서 아주 다양하게 해석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 말을 정확하지 않게 써도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매우 정확한 용량을 말해야 하는 과학적이거나 법률적인 문제가 없다면 그냥 다들 그렇게 쓴다.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다.
(조금만 더 햇빛이 들어도)라든지 (조금만 더 사랑했으면)이라든지 (한 치만 넓었어도), (쬐끔만 더 먹어), 요만큼과 표현은 달라도 같은 뜻을 가진 애매한 다양한 표현도 다 같은 맥락에서 쓰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 질량은 개개인 마다 다 다르다. 사람이 아픔을 느끼는 고통의 정도도 사람마다 다 다르다니까 사실 서로 같다고 생각하면서 인정하면서 사는 일이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는 무엇을 같다 다르다 로 쉽게 나눈다. 다르다거나 같다는 것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거기 한걸음 더 들어가 보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다르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다르냐고 한다면 매우 종류가 많다. 같다고 하는 것조차 같다고 느끼는 것에 불과한 일이다. 그래도 부부라든지, 친구라든지, 식구를 막론하고 같아서 싫어하고 같아서 좋아하고 또 달라서 좋아하고 달라서 싫어한다.
법이나 규칙은 아무리 잘 만들고 빈틈없이 규정한다고 해도 완벽하게 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의 도덕적 바탕에 성패가 달려있다고 본다.
그러나 도덕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고 규정이나 법은 짧은 시간에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충족하기 위해서 빈틈을 노리고 편법을 써서 행동한다. 세상이 발달하면 그만큼 더 분화된 복잡한 범죄가 생기고 단순화하기 힘들어진다.

나는 70대 중반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10년 내외의 생을 남기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아주 정확한 판단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거의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10년이라는 숫자는 그렇게 작은 수는 아니다. 그 숫자를 넘기면 그 숫자는 아주 작아 보일 것이고 못 넘기면 아주 커 보일 것이다.
자동차를 살 때, 집을 살 때, 돈을 조금만 더 주면 더 좋고 거기서 또 조금만 더 주면 더 좋은 차나 집을 살 수 있었던 경험은 누구나 다 있을 것이다. 인생은 그렇게 조그만 차이에 의해서 큰 차이로 나아가는 것 같다. 누구나 멈출 때를 알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멈추지 못하면 남이 멈춰준다. 내 의지가 멈추지 못하면 남에게 의지하게 된다. 미련은 인간적이기는 하지만 내 마음 속에 있을 때는 상관없지만 내 행동으로 옮기게 되면 자주적이고 멋있는 인생을 살지 못하게 된다. 하긴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 100퍼센트 나쁜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 피해는 나와, 나와 같이 한 배를 탄 사람의 몫이다.

나는 모든 일을 극단적인 데까지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우리는 누구나 양극단을 가지고 있다. 극단적인 데 까지 가보는 일은 나의 위치를 재는 일이다. 내가 어디 있는지 아는 일이다. 절벽이나 낭떠러지에서 멀어져 안전하게 가려면 거기까지 가보고 거리를 측정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본능이 시키는 일이다. 만약 다른 길이 없다면 낭떠러지도, 절벽도 기어올라야겠지만 매번 아차 하는 순간을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물론 목숨을 거는 일은 나를 강하게 하고 나에게 없는 힘까지 주지만 자주 그런 일을 하다보면 위험한 확률이 높아지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나무에 올라갈 일이 없는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으며 자신이 하는 일이 자신에게 성공도 실패도 주기 때문에 욕망과 적성과 타고난 재주를 냉정하게 어떤 때는 비겁하게 결단 내리며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만큼‘이라고 한다면 그 의미는 조금을 뜻할 것이다. 많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인생은 그 ’요만큼‘에서 결정 난다. 동전이 길에 떨어져 있을 때 그걸 줍는 사람은 대개 돈이 많은 사람들이다. 티끌이 모여서 태산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가난하게 사는 데는 마땅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름, 푼수 없이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돈이 없는 만큼의 여유를 부리면서 살았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여유는 내가 이미 돈으로 지불한 여유가 아닐까? 나는 나의 결정과 결과를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목표와 목적을 가지고 살아온 지금 나는 내가 예상했던 곳, 거의 비슷한 곳에 나는 와있다.
이렇게 말하면 칭찬이 되고, 저렇게 말하면 욕이 되는 것이다. 그 두 가지가 다 일리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람의 의견일 뿐이다. 우리는 동의하지 않아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장수하느냐 장수하지 못하느냐는 나의 욕심에 관한 문제다.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면 나는 언제 죽어도 살만큼 산 것이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 오래 살아도 단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