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이지만 11명의 형제와 함께 했던 이건형 학생 

만 16세 UBC의 사이언스 입학, 만14세부터 학원에서 학생들을 지도, 전교생 2500여명이 되는 캐나다 공립 학교에서 학생회와 동아리 활동의 리더, 어린나이에 공인어학 성적 상위 점수를 받아 한인신문에 성공 유학 사례가 소개되며 주목 받았던 어린 학생이 있었다. 바로 이건형 군이다. 그의 이력 중 하버드 대학교 디베이트 대회 챔피언 수상처럼 수많은 국제 디베이트 대회의 수상이나 과학도로서 도전하고자 했던 활동등은 아직도 모교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기억되는 독특한 사례로 남아 있다고 한다. 특히 관리형 홈스테이 일을 하는 부모님과 생활하며 어린 시절부터 다른 학생들과 부모의 사랑을 나누어야 했고, 참고 배려해야 하는 것이 일상이 눈이 띄었다. 그래서 조금은 다른 환경 속에서 나누는 삶 그리고 부담스러웠을 영향력, 시선 등을 어떤 방향으로 받아들이며 성장하였을지 궁금증이 생겨 이야기를 들어봤다.

 

Q 간단한 자기 소개
2010년 초등학교 5학년에 캐나다로 가족과 함께 조기 유학을 왔습니다. 에너지가 많아 몸을 활발히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아 상상하기를 즐기는 저는 영화나 소설 책으로 펼쳐질 수 있는 소재들을 제 기억속에 저장하며 그 이야기들을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들려주기를 종종 합니다. 현재는 이과생으로 학업을 이어가고 있지만, 문과생의 문학적인 영감도 가진터라 주어진 것을 의무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제 선택으로 배움을 진행 중인 과학도생입니다. 특히, 인간의 신체 중 브레인을 연구하고 탐구하고 싶습니다.
Q 외동아들이다. 처음 홈스테이 학생들과 지내게 된 시기와 그 때 감정
밴쿠버의 생활이 시작되며 함께 생활하게 된 친구들, 형,누나들이 5명이었습니다.
그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고 외아들이었던 저는 형제가 많이 생겼다는 이유와 캐나다 생활 모두 설레였습니다. 어떤 활동을 하여도 여섯명이라는 인원은 예능이 가능한 인원이었거든요. 그 당시 개별적으로 소장하였던 전자사전 속에는 저의 어린시절 만화 캐릭터 같은 목소리로 녹음된 추억들이 가득 담겨 있음을 얼마 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8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며 웃고 우는 일도 많았지만, 이 시간만큼은 모든 추억이 정지된 듯 좋은 기억만 생각이 났습니다. 이 감정이 저희 가정이 처음 이 곳에 왔었을 때 느꼈던 감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은 매순간 설레임이었고, 서로를 아꼈던 동지애였던 것 같습니다.
Q 현실적으로 학생이 느끼는 한국
교육과 캐나다 교육의 차이
한국 교육을 논할만큼, 성숙한 나이는 아니지만, 많은 아이들과 생활을 하고 한국에서 교육을 받다 온 학생들을 보며 알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의 교육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무궁한 인재들을 갇힌 사고 속에서 교육을 받게 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방학 캠프에 참가하면서 한국에서 온 중학생들과 활동한 적이 있는데 토론이나 응용력 수업에는 적극적이지 않은 것을 종종 보았습니더. 그러나 암기 활동이나 다 짜여진 활동들을 할 때는 참여도가 높습니다. 똑똑하다는 평가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특성일지 모릅니다. 반면 캐나다 교육은 자기 주도적인 학습이 주를 이룹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역량을 무한하게 끌어올려 줄 수 있는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학습의 1등보다 나누고 봉사하는 이들에게 찬사를 보내는 분위기를 어린시절부터 배울 수 있었던 가장 값진 문화였습니다. 좋은 재원을 많이 가진 한국의 교육이 세계의 열린 교육을 활용한다면 세계속의 대한민국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져봅니다.
Q 학생들과 살면서 좋았던 추억과
힘들었던 기억
혼자가 아닌 점은 늘 힘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학교와 외부 활동등을 하게 되면 늘 함께 생활하는 우리 가족이 다시 멤버가 되었기 때문에 호흡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교회에서 찬양을 한다던지, 여행을 가서 장기 자랑이라도 하는 기회가 생기면 우리는 늘 연습이 되었기에 즐겁게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빅토리아 하버 광장에서 엄마와 여섯 명의 우리들이 하나가 되어 “대한민국”을 외치며 “노바디” 라는 음악에 맞춰 춤과 구호를 선보였던 그 때는 지금도 가슴 뭉클합니다.
반면에, 언젠가부터 엄마와 아빠는 저만의 부모님이 아닌 것을 느껴갈 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다른 식구들을 친 자식처럼 여겨가며 생활하였고, 서로가 정이 들어 익숙해질 때부터는 더욱이 제 자리는 없었습니다. 모든 걸 나누는 기분이 들때에는 불공평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저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였기에 집 안의 사랑을 온전히 저만 받았었거든요 .제가 원해서 온 유학 생활은 어느 순간부터 후회가 생길 때가 늘어나기 시작했었고 아주 사소한 일상들은 제가 아빠엄마의 자식인지 둔감해지기도 하였던 것 같아요.
물론, 함께 생활하던 다른 가족들 또한 아픔이 있으리라 생각이 되긴 합니다. 그 시절 느꼈던 제모든 감정들은 저 자신의 입장에서만 표현하고 있는 것이에요. 배우는 활동들도 어느 순간, 모두 함께 해 가는 시기부터는 제가 가진 재능이나 발전을 키우고 싶은 개인주의적인 생각도 하기에 민망했던 것 같아요. 다른 아이들이 배우고 익히고 싶은 마음도 헤아려야 했거든요. 부모님은 그런 생각을 먼저 하셨기에 함께 배우게 하시고, 도움이 덜 필요했던 저보다는 다른 식구들에게 손을 더 내미셨던 것 같습니다.
배고픔과 배움은 늘 나누는 것이라는 부모님의 뜻은 생각이 커가는 저에게는 겉으로 표현할 수 없었던 외로움이 생겼었어요. 고교 재학 시절, 액티비티 활동을 할 때에는 한국 아이들이 많은 커뮤니티에서 활동을 했었습니다. 저희 가정은 내부적으로는 식구처럼 지내지만, 외부에서 보는 시선은 홈스테이였기 때문에 저의 행동 하나하나가 주목 받았고,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는 행동을 보인다 싶을때는 부모님께서 소식을 쉽게 접하셨기에 꾸중을 듣는 일도 비일비재 했었고 .환경적인 부분에서 저는 독립적인 사람으로 서는 것에 제약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이들보다 항상 잘 해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이나 의무감도 부담이 되었고 자녀를 건강하게 잘 성장시키는 일은 쉬운게 아닌 걸 알지만 다른 아이들의 부모 역할을 하며 지쳐가는 부모님을 느낄 때면 괜히 저 때문에 시작된 유학 생활 때문에 늙어 가시는 것 같아 죄송한 마음도 자주 들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 돌봐야 하는 아이들이 11명, 13명이 되어가는 시기에는 동생들과 동급생의 학습이나 생활 지도의 분담을 이끌어가는 코디네이터 역할을 해야 했던 것도 쉽지는 않았었고 제 실수나 게으름이 부모님께서 하시는 일들에 얼마나 큰 지장을 주는지 알았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없는 제 인생이었습니다.
Q 사춘기를 겪으면서 부모님께 서운했던 점
사춘기는 2016년 UBC를 입학 하면서 왔는데 가족과 함께가 아닌 홀로 기숙사 생활을 하며 생각 할 시간이 많아지다보니 그 전에 느끼지 못 한 서운한 점들이 하나씩 들춰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인생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 되는 일들이 늘어났고 식사 시간이 되면 혼자 밥을 먹어야 했고,고민 거리가 생겼을 때에는 의논할 대상이 없다보니 외로움도 깊어지고 계속 되는 생각으로 혼돈의 시간이었습니다.
또 고등학교를 또래 아이들보다 일찍 졸업하여 입학 한 대학교 생활은 부족한 일 투성이었습니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같은 학년의 학생들과 할 수 없었던 일상들도 있었고, 많은 동기 학생들은 IB나 AP 프로그램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1학년의 대학 생활을 동아리 활동이나 다른 배움들로 활동적이었던 반면 일반 프로그램을 공부하였던 저는 10과목 전부를 두 학기에 마쳐야 하는 부담으로 여유가 없었습니다. 사실, 고등학교 입학시에 IB학교에 배정 받은 저는 함께 사는 아이들과 스케줄을 맞춰어야 하는 이유로 학교를 변경하였는데 그 일이 후회스러웠습니다. 그래도 여섯 아이를 똑같이 양육하려는 부모님의 의중을 요즈음에 와서야 이해합니다. 그 혼돈의 시간 중에도 쉬는 날 집에 오게 되면, 돌봐주어야 할 동생들이 있으니 모른 척할 수 없었고 .그러면서도 부모님에 대한 안쓰러움과 부족한 동생들에 대한 책임감에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 시절, 저희 가정에 들어온 학생들 중에 ADHD와 우울증으로 조기 유학을 온 학생도 있었고 분노 조절 장애나 늘 인생에 대해 부정적인 마인드로 쫓겨오듯 유학을 온 아이도 있었습니다. 전반적인 돌봄은 부모님이 하셨지만, 또래의 눈높이로 길잡이가 되어주는 멘토 역할은 저를 비롯해 처음부터 함께 하였던 제 형제들의 몫이었기에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였습니다. 그리고,그 어려운 상황을 시간이 지난 지금 평가하여 보니, 그 아이들이 발전하여 제 자리에서 성숙한 인격체로 살아가는 모습에 뿌듯함이 생기기도 합니다.
8년이 넘는 타국 생활에서 제가 얻은 교훈은 서로 다른 친구들을 만나 함께 나누고 힘이 되어 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삶이란 더 가진 자가 아닌 나누는 것이라는 것을요.
Q 외동아들과는 다른 환경 속에서 현재 깨닫게 되거나 얻게 된 것들
흔히 인식되어 있는 외동아들은 “이기적이다. 생각이 부족하다. 풍족하다” 등일 것입니다.
저는 제 온전한 방을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함께 해야 하는 이유에서 방을 양보하고 부모님의 옆 자리를 내 주어야 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낯선 이 곳에서의 시작은 투정 한번 부리기가 쉽지 않아 혼자 생각하고 처리해야 하는 날들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춘기의 표현도 다른 아이들 보다 늦게 나타났고, 학업에 대한 열정도 눈 높이를 맞추어야 했습니다. 작년 대학 1년동안의 사춘기 시절을 고백하며 부모님의 마음을 절망으로 무너뜨린 일이 있습니다. 반항이라고 하기엔 너무 큰 일을 고백하며 제가 하고 싶은 일과 살아가고 싶은 지역에 대한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로 인해 지금은 새로운 도전을 위해 진행 중입니다. 결과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조금은 어린 나이에 제 인생에 대하여 고민하고 설정하고 싶은 표현을 할 수 있는것이 어쩜 외동 아들이 아닌 환경에서 성장하였기에 가능한 것 같습니다.
겉보기에 외아들, 유학파 등으로 포장되어 비아냥을 들을 수 있었던 저를 특수한 환경에서 성장시킨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Q 앞으로의 활동 (장래 희망)
어린 시절부터 무엇이 되고 싶다는 것보다 “이건형”이라는 이름을 남기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함께 한 식구들을 보면서 어느 날 사람의 신체와 정신, 또는 마음 등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의학쪽에서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습니다. 어쩜, 법학을 전공하신 부모님의 영향이나 대학 입학시절 의예과를 합격함에도 선택하지 못 하였던 어머님의 영향이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분야에 대한 관심과 꿈은 제가 선택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의사가 되고 아니고의 결과론적인 입장이 아닌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삶과 죽음에 조금이라도 좋은 쪽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경제력이나 보이는 것에 대한 영향력 보다는 가정의 문화나 제가 가진 능력에 대해 존중해 주셨고, 어린 시절 유학을 오는 것에 대해 응원을 해 주셨던 친할아버지의 기억은 사춘기를 겪어 일탈하고 싶었을 그 시점에도 저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10학년 재학시절 ,한국을 잠시 방문하였을 때였습니다.
평생 군인으로 반듯하고 강인한 모습만 보이셨던 할아버지께서는 알츠하이머로 인해 할머니께 평소와 다른 거친 언행과 억지스러운 행동을 보이시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가족들이 할아버지의 말씀과 기억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듯 보였지만, 인간의 행동 방향을 전혀 다르게 만드는 “뇌”라는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지금까지 밝혀진 연구 결과와 사례를 찾아보았습니다.
‘나에게 있는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그 깊이까지 끓어 올려 알아내고 알리는 역할을 내가 할 수 있다면’ 이라는 기대는 내가 무언가는 하겠구나 라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물론 0.1%만이 의사나 연관된 일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들보다 어쩜 주어진 학습을 해내는 부분이 부족할 수도 있지만,알아가는 배움에 힘들어 하지 않는 제 에너지와 부모님으로부터 보고 배운 배려, 그리고 가족들 특히 지금은 고인이 되신 친가와 외가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지지를 기억하는 저는 분명히 다른 이들과 다른 인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Q 가족들에게 한 마디
저에게 가족의 모습은 다양합니다. 보통 또래 아이들에게 가족은 피를 나눈 관계를 말하겠지만, 저에게 가족은 수 십 명의 함께 먹고 자란 저희 가정의 구성원이었던 모든 이들입니다. 그 삶이 때론 힘들고 서운하게 한 점도 많았지만 지금 반성하고 값지게 여겨지는 모든 기억에 감사함을 여깁니다. 남과는 달랐던 저의 생활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축복이었음을 기억하려 합니다.
어린 시절, 저의 잠재 능력을 지나치지 않으시며 열린 환경을 열어 주신 부모님께는 고개숙여 존경함을 표합니다. 제가 부모님의 자리에 섰다면 다른 사람의 자녀를 내 마음처럼 돌보려 하지 못 하였을 것이에요. 나누는 것에 인색하지 않는 너그러움도 타인의 인생을 소중히 여겨주시던 마음도 모든 것이 제게는 값지게 물려주신 재산임을 기억하며 살아가겠습니다.
큰 일을 하는 사람은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는 현실이 잘 못 되었음을 가르쳐 주셨고, 성공하는 사람들 또한 각자의 가정 또한 돌보는 것에 소홀히 하지 않는 다는 중요한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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