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살이 거실 깊숙이 들어온다. 햇살 덕분인지 게발선인장이 느린 몸짓으로 꽃봉오리를 부풀리고 있다. 이 화초는 여름내 게발게발 잎만 키우다가 겨울이 깊어서야 잎새 끝에 바늘구멍만한 상처를 내고 개화를 시작한다. 붉은 기미뿐인 잎만 바라보고 있으면 그 느린 행보 때문에 답답증이 생긴다. 그러기를 이십여 일, 상처는 봉오리가 되어 제법 봉싯하다.
기다림이 지루한 날 꽃차를 우린다. 말간 유리 다관에 마른 꽃잎 대여섯 송이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꽃잎은 뜨거운 물세례를 받고 한동안 혼절한다. 후줄근하다 못해 남루하다. 그 쇠락이 민망하여 장사익의 ‘찔레꽃’을 듣는다.
햇살은 주춤주춤 기어 나와 마지막 손길인 듯 봉오리 부푸는 게발선인장을 쓰다듬고 추녀 밑으로 올려 붙다가 뜰 앞에 나목으로 선 호두나무를 탄다.
사람들이 차를 마시는 이유로 눈으로 즐기는 맛을 최우선으로 꼽는다. 이어 코끝을 간질이는 향기를 탐하고 마지막에 혀끝에 감도는 깊은 맛을 즐긴다지만 내가 꽃차를 우리는 것은 혼자 놀기 위해서이다
점점 밖으로 나도는 일이 편치 않다. 바쁘게 사는 젊은 사람들 만나면 시간 빼앗는 것 같고 동기간들은 멀리 살아서 만나기 어렵다. 만만한 게 친구인데 친구들은 물리치료실에 가서 누워 살고, 아프다고 하니 찾아가기도 미안하다. 강의가 있는 날을 빼고는 집안에서 지내는 일이 많다. 전 같으면 책을 들고 있으면 하루가 언제 지나가는지 몰랐지만 지금은 십여 쪽을 읽고 나면 눈이 아프다. 좋아하는 연극이나 영화 나들이가 뜸해지니 자연 소일하는 농장 출근이 제격인데 아직은 겨울이다. 적적한 날이면 나는 소꿉놀이를 시작한다.
햇살이 포근하게 비쳐드는 거실에서 달그락 달그락 다기를 꺼낸다. 자주 마시는 보이차를 우릴 때는 앙증맞은 자사호(紫沙壺)를 내고 우롱차를 마실 때는 음전한 백자 다관(茶罐)을 쓴다. 그러나 꽃차를 우릴 때는 유리 다관(茶罐)이 제격이다. 배시시 피어나는 꽃잎을 볼 양이면 투명한 유리 다관(茶罐)을 빼놓을 수 없다. 성정이 급하고 조신하지 못한 내가 다탁 앞에서만은 요조숙녀가 되는 이유가 바로 차의 고요한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전해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오늘은 남편의 외출로 한가로워진 겨울 오전, 나는 아예 차 살림을 제대로 해 볼 요량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차칙(茶則)과 차호(茶壺), 탕관(湯罐)을, 숙우(熟盂)와 다관(茶罐)을 늘어놓으면 우리 집 남편은 꼭 한마디 소금을 뿌린다. “뭐 하는 거여? 칠십 노인네가 소꿉놀이 하나 벼, 흥” 하며 콧방귀를 꾼다. 그는 커피 마니아다. 간단하고 과학적이고 지적인 차가 커피라며 평생 마신 커피가 백두산 물 만큼 될 것이라고 큰소리다. 이럴 때 나는 이외수 님의 ‘하악하악’을 빌려 쓰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밖에는 간간이 바람이 분다. 먼 도로에는 차량들만 오갈 뿐 사람은 없다. 지금 장사익은 “찔레꽃처럼 춤 췄지, 찔레꽃처럼 노래했지, 당신은 찔레꽃처럼 울었지” 애절하게 넘어가고 있다.
그 사이 우리 다관에는 화면이 바뀌었다. 노란빛 봄이 와 있다. 화사하다. 꽃잎들이 모두 아래를 내려다보고 제 본새로 활짝 피어난다. 하염없이 바라본다. 어찌 이리 고운가. 살아서 한세상 죽어서 또 한세상, 요술 같다. 중국 오대산 자락에서 피어 살던 꽃이 죽어 환생하여 여기 한국 땅에서 또 피어난다. 세상 만물이 인연법에 따라 윤회하며 몇 천겁을 태어나고 사라짐을 거듭한다더니 이 꽃송이가 나에게 그것을 설법하려나 보다.
다관을 치켜 올려 본다. 금련화 꽃송이가 수면 아래로 꽃잎을 열고 웃는다. 다관을 흔들어 보면 출렁이는 노란색에 취해 현기증이 날 것 같다. 벌써 봄 멀미가 나는가. 향기도 잊고 맛도 잊고 바라만 본다. 현기증 같은 묵은 그리움이 꽃잎처럼 피어오른다. 장사익이 하얀 찔레꽃을 보고 그 향기가 너무 슬퍼 울었다고 목을 꺾는데 죽었다가 살아나는 꽃잎이 대견해서 속이 아리다. 손이 닿으면 바스러질 것 같은 마른 꽃송이를 차칙으로 퍼내 다관에 넣을 때 내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 어떤 주검 앞에 있는 것 같은, 거기다가 섭씨 백도의 물을 부으며 스스로 잔인하다 생각했다. 두 번 죽는 참담함…. 그러나 꽃은 미움도 원망도 없이 환하게 새로 피어 웃으니 바로 보살이다. 정말 우리 삶의 여정 밖에도 이런 세상이 존재하는 걸까.
혼자 놀기가 오붓하다. 마음 눈 떠 있으면 천지 만물이 보살이다. 느린 걸음으로 피어오르는 게발선인장도 보살이오, 멀리 중국 여행 중에 벗을 위해 꽃차를 사 온 문우도 보살이다. 나는 햇빛 보살, 노래 보살, 꽃 보살과 더불어 덧없다는 한생을 순례하는 열락에 취한다. 혼자 놀기 칠십여 년 만에 눈뜨는 각성이다. 고요한 마음 호수에 두 손 합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