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사람이 혼자있는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그래서 배우자와 짝을 이루고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엮어지면서 자녀도 생기게 된다.
시작은 이런 저런 사연으로 맞추고 재어보고 하면서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만났지만 부부의 세계를 만들어가면서 살아내는 일은 만만치 만은 아닌 일인 듯하다. 변화라면 둘이 함께 한집에서 살뿐인데 서로 다른 인격체가 만나서 생각도 같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일도 같기를 바라면서 얼토당토 않은 꿈을 꾸고 있다. 거기다 서로가 자신에게 맞춰주고 소속 되어주기를 바라면서…..

과연 이 일이 가능하기는 한 일일까?
지붕 뚜껑 열고 볼 수 없는 일이기에 정확한 대답은 할 수 없으나 우리 부부의 이야기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특별히 알맞은 짝을 만나 문제없이 온전히 믿음이 가고 모자라는 면이 있다면 채워주는 그런 부부는 어디서 무얼하고 살고 있을까? 그런 부부는 이 지구상에는 없을 것 같다.

왜 그럴까?
“나”와 “내 것” 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소유욕 때문일것이다. 결혼을 했다고 배우자의 것이 모두 내 것이 될 수는 없는 일임에도 “나”라고 주장하는 그 존재는 분별과 비교의식속에서 하염없이 찾아 다니고있다.그 분별과 비교는 어딘가에 나와 같지 않은 잘 사는 부부가 있을까하여 생각으로 이집 저집 기웃거리고 있을뿐이다. 그 해답은 자기집 울타리안에 있는 줄은 모르는 채…

분별과 비교분석안에서 잘 사는 부부는 없다!
또한 각기 다른 “나”라는 사람 둘이 만나서 같다는 걸 보여주는 일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인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의 이목을 저버리지를 못하고 있고 가능한한 사이 좋은 부부로 보이고 싶어한다. 그러자니 사랑하고 진솔해지는 일보다 사랑을 저울질 하는 일에 더 집중하게 되면서 소유욕 발동이 수시로 걸려오게 된다. 이 소유욕은 의심과 걱정을 동반하면서 불안의 도가니로 부부생활을 몰고가기도 한다. 영어에 Expectation (기대)와 Respect (존중)이라는 말이있다. 기대는 쉽지만 존중은 어렵다.
둘 다 부부생활에서 필요 불가결한 일 임에도 불구하고 기대가 채워지면 존중해주겠다고 말을 하고 있다.과연 그렇게 되어질까?
그건 잠시 잠깐의 기대의 부응이 있기는 하지만 새로운 반응인 명령과 복종의 무언의 전쟁이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하다.그럼으로 인하여 존중은 이론에 불과하고 기대와 명령과 복종에 각이 세워지면서 상대의 문제만을 탓하고 둘 다 자신의 문제만 알아 달라고 아우성치는 부부의세계는 아사리밭이고 지뢰밭 그 자체이다. 다만, 기대는 아무리 채워도 만족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의 상황과 상태를 볼 수 있는 날이 있었다.
그일은, 이 나이에 무슨? 아니면 누가알까 두렵고 챙피하기도 했다. 남편을 의심하고 불안해하면서 서운한 맘으로 고립된 것 같았다. 그러면서 남편의 일상을 체크하고 있었으며 이런 일을 다른 사람이 겪고 있다면 그렇게 큰일로 여겨지지가 않겠지만 이름하여 “의부증” 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한건 피할 수 없는 그 마음이 불편하게 이어져가고 있었다.
40년을 함께 살면서 힘들고 고통스러웠다는 일이 “의부증”이라는 이 한마디로써 결론 지워진다는 일이 참 허무한 일이었지만 진실의 뼈대는 내가 지금 이런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의 “병” 이라는 것과 증상이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음이 인정되고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면 옛날에는 이런 일이 어디에 숨겨져 있었는가? 또 다른 그보다 더 큰일이 목전에 있을 때는그 일은 묻혀 있었을 뿐이고 의심하고 조종하고 미워하는 일들은 다른 종류의 일에서도 나타난 같은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의 잔소리가 당연하다는 일이고 내 문제는 은폐하고 배우자의 약점을 더 크게 부각시켜 내가 많이 참고 사는 사람으로 남기를 원하는 자신마져도 속이는 일에 급급했다는 일이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것이 나의 문제이고 내가 책임질 수 밖에 없는 일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 일은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이미지가 손상되더라도 표현하는 일이었다.” 난 질투가 난다” “당신의 그런 말과 행동이 섭섭하고 무시당한 것 같아서 서운하다”는 등 그때에 상대방의 반응은 내 몫이 아니다. 나자신이 더 초라해 보일수도 있겠지만 이럴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럴 때,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이 있다면 우아함과 자존심 체면유지 이런 것들이었다.
부부가 서로만나 살고자 했을 때는 서로 소통이 되고 모자라는 부분이 있다면 채워주면서 기대기도하고 상대가 기대도록 어깨를 내어줄 때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내게 모자라는 것도 자존심 땜에 표현하지도 못하면서 한껏 기대만 하게 되고 명령하여 복종시키려고 한다면 답답한 일만 생기게 될 것이다.
부부의 문제는 둘의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각자의 문제이다 . 다르게 말하자면 상대를 잘못 만나서 생긴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고 나의 문제로 어떤 다른 상대를 만나더라도 겪을 일이었다는 것이다.다만 , 나이를 먹어도 남자이고 싶고 여자이고 싶기에 질투도 있고 시기도 할수 있다는 것이고 그런 문제가 없다면 다른 문제로 둔갑을 할 수도 있다는 게 그 우아함의 표현인 무시와 무관심은 더 큰 함정으로 몰고 갈수도 있다는 것이다.

매일이 맑은 날만 있다면 대지는 사막이 될 것이라고 했다.
내가 비록 지금 챙피하고 자존심에 각을 세우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런 나를 인정하고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맑은 날만 계속 되지않는 비 오고 궂은 날도 사막이 되지 않게 되는데 필요한 날임을 알게 될 날이 오지 않겠는가? 계속해서 편안해지지 않는 답답함이 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의 문제에만 집중할 수 있는 정직하고 진솔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는 시기이다.그것은 나의 “습”이고 “에고”임을 알게 되면서 내가 해결해야할 나의 일이라는 것이다.하지만 이 “습관”이라는 것이 그리 만만하게 우리에게 자리를 내어주지는 않는 일이라는 점이다.

나의 민낯을 본다는 것은 본성(깨달음)을 체험하는 길이 가장 정확하고 확고한 길이었다 .
이 길을 체험하게 되면 하루는 괴롭다가 하루는 맑았다가 하는 마음이 변덕을 부리지않고 더이상 물러서는 일이 없는 “불퇴전의 지위”가 유지될 수 있다.

결국 부부의 세계는 각자의 습관과 고집의 대결인 것 같다.
이 본성(마음)의 자리에 있다면 굳이 대결구도가 아니더라도 벗어 날 수 있다. 배우자와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면서 부담스럽고 피해가고 싶을 때가 있기 마련이다. 다만 나만 겪고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고 우리 부부는 오늘 다른 집은 또다른 시간에 조금씩 다른 문제로 앓고 있다는 일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