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사실 평평하다. 둥글지 않다’고 말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의아해 할 것이다. 수많은 과학적 근거로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둥근 별이라는 것이 증명되고 있고 우주공간에서 찍은 지구사진들이 의심할 여지 없이 공 모양을 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천체에서 공이 아닌 삼각이나 사각 모양으로 되어 있는 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알고 있는 사실에 반해서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지구가 평평하게 생겼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평평한 지구 학회’를 구성하고 2017년 11월 9일-10일 이틀에 걸쳐서 노스캐롤라이나의 캐리에서 제1회 콘퍼런스를 열기도 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에 따르면 2019년 “미국 인구의 89%만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믿고 있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내가 언제 실제로 둥근 지구를 본 적이 있었지?”, 혹은 “내가 언제 내 눈으로 둥근 지평선을 본 적이 있었지?”라는 질문을 하면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에 의문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믿으려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동쪽을 봐라, 태양이 떠오르고 있지 않은가! 정오에는 머리 위에 왔다가 저녁에는 서산너머로 내려가지 않는가. 눈으로 보면서도 딴 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지구 평면설을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에 근거하고 있다. 2500여 년 전 저자도 확실하지 않은 책에 적혀 있다고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성경이라는 권위와 믿음을 빙자해서 그렇게 믿고 싶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모든 과학적인 근거와 증명은 자신들의 믿음을 파괴하기 위한 음모라고 매도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평면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서서히 증가하고 있다. 성순출판사를 경영하는 김국일이라는 사람이 ‘사랑한다 평평한 지구’를 출판하고 2018년에는 평면 지구 국제 컨퍼런스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천둥 번개가 치면 하느님께서 노하신 것이고, 지진이 나서 땅이 갈라지고 화산이 폭발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징벌하려는 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도 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막무가내로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있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6500만 년 전에 지구상의 모든 공룡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공룡은 놀랍게도 전 지구상에서 지역에 관계없이 넓게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많은 화석들이 발견되고 있다. 그런데 무슨 원인인지 모르게 어느 시기에 갑자기 모두 사라졌다. 공룡의 존재를 부정하고 화석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6000여 년 전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믿음을 흔드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진화론의 근거는 아주 간단하다. ‘모든 사물은 변화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모든 자연은 어제나 그제, 또는 수 천 수 만 년 전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짧은 시간을 놓고 보면 변하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상 긴 세월을 놓고 보면 분명히 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변화했느냐 보다는 변화해 왔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이런 분명한 과학적인 논거를 무시하고 진화론을 학교에서 가르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믿음이란 사리를 따지지 않는다. 이성의 판단을 통해서 시시비비를 가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믿는 대로 믿고 싶어 한다. 믿음을 포기하면서 평안을 깨트리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믿음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사람을 해친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네안데르탈인들이 멸종된 것은 그들이 신화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화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지향하는 문화적 목표이고 삶의 가치가 된다. 신화가 없다는 것은 믿을 대상이 없다는 것이고 믿을 대상이 없다면 그들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줄 모티브가 없다는 뜻이 된다. 이집트를 비롯해서 그리스 로마의 신화들은 서구문명의 바탕이 되었다. 아마 역사는 양파 껍질을 벗기듯이 신화의 껍질들을 하나하나 벗겨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현재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들 중에 상당수가 시간이 흐른 후대에 마치 근거 없는 허황한 것들이었다고 밝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집념이나 신념, 사상이나 주의는 모두 변하기 마련이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등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다. 그것들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목숨마저 바치고, 남의 목숨도 빼앗았던 역사는 우리를 허무하게 만든다.
지구가 둥글다고 여기는 사람들 앞에서 평평하다고 우기는 사람들은 비단 지구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우리 일상과 주위에 알게 모르게 널리 산재해 있다. 믿음은 믿을 만한 모든 과정을 거친 뒤에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러저러한 한두 가지 이유로 간단히 믿음에 빠져든다.

공자께서는 네 가지를 절대로 하지 않으셨는데 그것을 자절사(子絶四 毋意, 毋必, 毋固, 毋我)라고 한다. 자신만을 내세워 기필코 무엇을 하고야 말겠다고, 사사로운 뜻으로 막무가내 고집을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한 가지에 빠지면 다른 것들이 보이지 않고 편견에 사로잡힌 집착이 생겨서 그것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커다란 문제를 일으키게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반드시 다툼이 생겨나고 서로 제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폭력까지도 마다하지 않게 된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뜻을 자기 나름대로 곡해했던 어떤 믿음이 좋은 사람이 홍수에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를 <오강남의 생각>이라는 책에서 옮겨와 봤다. “어느 마을에 홍수가 들었답니다. 그 마을에 사는 믿음 좋은 사람의 집에도 물이 들었습니다. 아래층이 물에 잠기자 조그만 배가 와서 타라고 했습니다. 집 주인은 ‘하나님이 자기 같은 믿음이 좋은 사람은 구해주시리라’ 굳게 믿고 배를 돌려보냈습니다. 물이 위층까지 차오르자 다시 구호정이 와서 타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다시 하나님이 구해주실 것이니 문제없다며 배를 돌려보냈습니다. 물이 불어 이제 지붕에 올라갔는데 다시 배가 와서 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해서든 자기를 구해주리라 믿고 다시 배를 돌려보냈습니다. 결국 물이 지붕 위까지 덮치게 되어 그 사람은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천당에 가서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나같이 믿음 좋은 사람을 구해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시냐고. 하나님 왈, ‘내가 너한테 세 번이나 배를 보냈는데 네가 다 거절하니 어쩌겠나.“
이 글은 새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옛말을 생각나게 한다.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오직 하느님께서 알아서 다 해주시겠지 하는 것은 잘못 된 믿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는 일마다 오직 ‘하느님의 뜻’이라고 여기면서 자신은 빠지고 하늘에만 미룬다. 하느님의 뜻인 줄을 어찌 알았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