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제공 전재민

2년 넘게 코로나19로 문학 단체의 활동이 제약을 받다가 2023년 열린문학회및 제 8회 밴쿠버문학발간 기념회를 한인타운인 노스로드 세인트 스테판 교회에서 9월 16일 토요일 오후 3시에 있었다. 한국문힌협회 캐나다 밴쿠버 지부는 2005년에 [바다 건너 글 동네] 창간호를 발간한 이후 부 정기적으로 기관지를 발간하고 있지만 지금 현재는 매년 문학 지를 발간하고 있다.
현재 서부 지역인 밴쿠버에는 한국문인협회 캐나다 밴쿠버 지부(1997년)과 캐나다한국문인협회(Korean Writer’s Association of Canada){2009년 설립] 그리고 캐나다 한인문학가협회가 활동하고 있다.
열린문학회는 부회장 로터스 정이 사회를 보고 회장 임현숙 시인, 장민우 재향군인회회장의 외빈 축사와 축가 임윤빈 부회장이 추심과 뱃노래를 하면서 행사가 시작됐다.
작품 낭독으로 시와 수필이 이어지는 1부 순서 이후 밴쿠버 지부의 자랑인 김 영주 시인이 밴쿠버에는 시인이 산다 시 낭송이 있었다.

 

밴쿠버에는 시인이 산다
김 영주 시인
이 땅에서
실향민으로 30년, 그렇게 세월이 갔다

참으로 갈 곳이 없을 때도 있었다
무일푼처럼 허전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 나는
흙 바람 부는 조국을 바라보며
시를 써댔다

시인이여,시인이여 그대
무엇을 증명하려고 시를 쓰는가
수채화를 그리듯
인생을 풀어 넣다가
산다는 것은 혁명임을 깨닫는다

2018년, 새해
나 이제
60을 넘어 훨훨 더 넘어

세상에 나가있는
모든 내가
돌아오는 시간이다

후레이저 강변 시인의 마을로 가자, 가서
가장 먼데까지 가보는 강물로 흐르다가

시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시인의 마음이 만져지는
그런 들풀 같은 시를 쓰리라
줄기차가 줄기차게,
이 아름다운 길을 걸어 가리라.

 

시를 낭송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소녀처럼 고왔다. 이제 머리에 서리가 내린 것도 모자라 요양원에서 꾸미지 않고 나와 만면의 웃음을 띄고 있는 그녀를 나는 행사가 다 끝나고 다과와 김밥까지 챙겨 먹고 내 배가 부른 후에야 그녀의 앉은 자리에 가서 내가 전재민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이 몸이 아직 그녀의 관심까지는 받지 못했는지 못 알아 들으시는 것 같아 토론토에 백복현 시인이 안부 전하더라고 하니 그제서야 어 나 백복현이 알아 그러신다.
그녀의 시가 어쩌면 나의 삶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다. 내년이면 만 60이다.밴쿠버에 산지 만 28년을 넘어 29년을 향해 가고 있다.
창으로 갈 곳이 없어 바닷가에 가서 소리를 지른 날도 많았다.
한국에서 오는 비행기만 봐도 누군가 아는 사람이 올 것만 같았다.
내 주머니는 늘 비어있고 마음은 늘 고파 있었다.
때론 어린 애가 내 이름을 부르면 속에서 화부터 났다. 그러다가 그가 내가 자기 또래로 보인다고 하면 또 마음이 금방 행복해지곤 했다.
이방인이어서 서러운 날들도 많았다. 직장에선 난 늘 홀로였다. 중국인이 많거나 필리핀인이 많거나 인도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늘 경계의 눈초리로 날 바라보고 나의 단점 만을 찾으려 했다.
그 한 많은 날들 나도 시를 쓰는 시인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내지 못하고 그저 안으로 우는 아이처럼 울고 또 괴로워 했다.
때로는 중국인 성장동력과 소주와 빼 갈등으로 술이 떡이 되어 노래방도 가고 중국 군가를 중공군처럼 부르는 그들과 어깨동무하고 이런 순간이 영원하기를 하고 바랬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게 어디 그리 순탄한 길이 있던가 파업을 하고 얼마 있다가 9.11이 터지고 동료들 대부분이 해고됐다. 언제 돌아 갈지 돌아 가도 계속 일을 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평생을 하겠다 던 직장을 7년 만에 떠났다. 당시 시간 당 17불을 받았다. 지금으로 치면 아주 많이 받았었다. 우유 4리터 한통이 99센터 하던 때가 이민 오던 1995년이었다. 중고차를 끌고 다녀도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그 후에 직장을 떠돌고 내 사업한다고 잠시 외도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산행을 알게 되어 산을 가면서 유병옥 시인에 대해 듣게 됐다. 산우회에 예전에 시인이 있었는데 너처럼 늘 시를 끄적이고는 했다고 하면서 그에 대한 전설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반병섭목사님의 시비가 있는 써리의 공원에서 반병섭 목사님의 시를 음미하고는 했다.
수채화를 그리듯 거미가 거미줄로 집을 짓고 어부가 낚시를 하듯 생업에 열중하듯 그렇게 삶 속에 시가 내게서는 땔래야 땔 수 없는 그런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나는 시가 어려워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마른 모래땅에서도 시멘트 사이에서도 자라나 꽃을 피우듯 그렇게 시는 고난과 역경을 뚫고 마음에 꾹꾹 늘어놨던 것들을 거미줄처럼 풀어 내는 것이다.
2세를 남기기 위해 추운 곳에서 얼음 속에서도 꽃을 피우고 시를 맺듯이 그렇게 내가 살다 간 흔적일랑 한켠에 남기고 싶다. 나도 밴쿠버에는 시인이 산다고 외쳐보련다.선배시인들이 살아 온 길이 있듯 나의 살아온 길에 피어난 못난 꽃(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다 이쁘더라)을 피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