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평생 무슨 결정이든 결정을 하고 산다.
나는 어려서 철이 없을 때, 부모님에게 꾸중을 들으면 내심 내가 태어난 것이 나의 결정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것은 마치 옳은 항변처럼 보였지만 오랫동안 숙고해 본 결과 나의 생각이 짧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일생을 살면서 무수한 결정을 해야 하는 일이 생기지만 그럼,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결정을 하면서 사는 걸까?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에서 자신의 어떤 결정의 결과와 무게를 생각해보게 하는 기회가 있었다. 차라리 남의 결정에 의해서 나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하는 생각까지 하니 말이다.
그래도 나는 나의 일은 내가 결정하는 것을 선호한다. 아니 줏대 없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 모든 결정을 가급적 자신이 해야 한다고 노력하는 편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말해야 할 때가 있다.
단지 선택이 필요 없는 의견이라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선다형 시험을 볼 때처럼 문제의 답을 몰라도 요행을 바라면서 찍는 방식의 답은 틀리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오히려 맞는 답을 찍었다면 운이 좋다는 말이지만 그것이 단지 시험문제의 한 개의 문제가 아니고 그 답에 따라서 내 생명이 오간다든지 그 이상의 결과를 초래한다면 어떨까? 마치 러시안룰렛(Russian Roulette)게임처럼 말이다. 그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그런 기회를 만들지 않는 것이 좋은 결정일 것이다.

우리는 한 가지 일에도 많은 결정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
40년을 같이 살고 있는 나의 아내는 어떤 결정이 필요했을까?
아내의 결정과 나의 결정이 같아서 우리의 결정이 지금의 결과를 낳은 것이지만 그 전에 결혼을 해야겠다는 결정이 먼저 필요하다. 결혼을 안했다와 못했다의 차이가 크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다른 사람들, 예를 들자면 양가 부모의 결정도 많이 작용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기도 하다.

모든 결정은 자신의 책임이다. 어려서 내 결정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의 탄생비화도 정자일 때 난자를 향해 달려가던 자신의 결정을 기억이 없거나 가물가물하다고 단지 부모님의 사랑에만 책임을 돌린 것은 생각해보면 나의 무지였던 것이 아닐지. 자신의 모든 결정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자신의 전부를 걸고 했다는 자부심의 영역이다.

군 복무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할 때가 있었다. 퇴근 후에 직장동료들과 한잔 술을 나누는 것은 힘든 직장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낙이다. 한잔 술에 빠질 수 없는 안주가 사장님에 대한 뒷담화가 아닐까? 거기에 단순한 불평을 넘어 자신이 얼마나 유능하냐는 것을 선전하는 장으로 쓴다. 그 때 사장의 결정은 틀렸다, 나라면 어땠다는 등등 취기는 분위기만큼 자신의 가치도 급상승시킨다. 누군가 찬물을 끼얹는다.
“지나간 일의 결정은 누구나 다 한다. 다가올 일의 결정은 사장 밖에는 못해. 사장은 손해가 나면 그 결과를 책임지는 오직 한사람이니까. 그렇다고 직원의 급료를 까지는 못하니까..”
이로서 우리들의 술자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엄격히 나는 나의 몸과 마음을 책임지는 사장이다. 나의 일은 내가 책임진다. 아니 책임질 수밖에 없다. 이점이 자신을 초라하게도 멋있게도 만든다. 나는 나의 아내를 나의 아내로 결정했고 그 사실은 러시안룰렛(Russian Roulette)게임으로 살아남은 것도 아니며 선다형 시험에서 확신이 없이 찍은 결과도 아니다.

그런데 완벽한 기억이란 없는지도 모른다.
이런 중대한 결정에 대한 나의 기억도 아내의 기억과 일치하지 못했다. 아내의 기억을 뛰어넘지 못했다. 사실 나는 아내의 결정에 의해서 아내의 남편으로 결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그 결정이 러시안 룰렛 게임이었는지 선다형 시험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멋지게 결정한 나의 결정이 기특해서 내려준 결과라고 유추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