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용기>
1971년 이 곳 밴쿠버로 이민 와서 처음 프레이저 뷰 골프장에 나가 보니 골프 치는 사람들은 별로 없고 노인 들 몇 명 만이 골프를 치고 있는 한가로운 풍경이었다. 부킹도 필요없고 아무 때나 나가면 칠 수 있는 골프 천국이라는 만족스런 환경에 감사했다. 골프비는 내 기억으로는 4달러이었으니 우리나라에 비하면 거의 공짜 같아서 언제든지 시간만 있으면 나가서 즐기고는 하였다. 그 당시 나는 배에서 승선 근무를 하였기 땨문에 3주 정도 집을 떠나 Tug Boat에서 근무하고 집으로 돌아와 3~4주간 쉬므로 주중에는 골프장에 나가 그 곳에서 만난 서양 노인분들과 함께 골프를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혼자서 서양사람들과 골프를 치다가 얼마 후 반병섭 목사님과 백린기 장로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 분들과 함께 주중에 골프를 치곤 하였다.
 
그러던 중 김능순 사장님과 황정은 장로님이 당뇨병을 극복하려면 운동을 해야한다고 하며 월요일과 목요일에 어울려서 골프를 함께 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월목회가 시작되었다고 기억한다. 나는 3주 동안 집을 떠나 승선근무해야 함으로 정기적으로 월목회에 참석 할 수 없었고 집에서 쉬는 동안엔 참가하여 여러 친구들과 친숙한 관계 속에서 골프를 즐기곤 했다. 산천이 수려하고 공기 맑고 아름다운 이 곳에서 만난 여러분들과 기쁨으로 이민 생활을 같이 하면서 골프로 심심단련을 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 가득하다.
 
골프 이야기를 쓰다보니 내가 이 곳으로 이민하여 생소한 캐나다 문화권속에서 새로운 삶과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얻게 된 경험과 첫 이민생활을 생각하게 되어 지루한 내용이지만 이 곳 이민 역사에 옮겨 심은 나무 뿌리가 제대로 깊숙히 자리 잡기까지의 고충을 쓰려고 한다.
 
이 곳에 처음 왔을 때에는 밴쿠버에 400~500명 정도의 교민들만이 살고 있었다. 당시 캐나다는 유색인종 이민이 허용되지 않았고 1960년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제한된 유색인종 이민이 허용된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우리 교민들이 캐나다에서 한국사람으로 첫선을 보인 셈이다. 한국사람에 대한 첫 인상이 우리나라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형성한다는 각오로 각 분야에서 성실하게 일하며 한국사람과 접한 캐나다 사람들은 많지 않았지만 한국 사람을 만난 캐나다 사람마다 칭찬하고 같은 동양인 중국, 일본 사람들과는 달리 성실 근면하여 수준 높은 국민들이란 말을 들었던 일들이 기억난다. 이 곳에 일본인들은 농사화 어업이 주를 이루었고 중국인들은 대륙 횡단 철도 노동자로 고용되어 일하다가 정착하게 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과는 달리 교양있고 학벌이 높고 인격적으로 품격을 갖춘 한국 사람들은 그들의 눈에도 달라 보였던 것 같다.
 
나는 여름철에 연어 운반선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리치몬드 스티븐에 있는 BC Packer 회사의 생선 처리 공장에서는 많은 중국인들과 일본사람들이 일하고 있었다. 나는 연어 운반선에서 항해사, 또는 선장으로 열심히 일하였고 그 회사의 인사담당자로부터 큰 신임을 받고 일할 수 있었다. 이 분은 가끔 그 곳 직원들에게 한국사람은 같은 동양인이지만 중국인이나 일본이들과는 달리 성실하고 우수하다는 말을 하곤 하였다. 그 후에 이 회사에서는 한국사람이라면 무조건 좋게 평가하여 많은 한국사람들이 이 공장에서 취업하여 일을 하게 되었다.
한번은 한국에서 연어를 운반하러 온 한국선박 기관사가 캐나다에 오고 싶다고 하여 회사 인사 담당자가 그를 이민국에 취업 신청하여 이 곳에 오게 했던 일이 기억난다. 이 곳 Tug Boat 배에서 처음으로 근무하게 될 때는 알지 못했지만 그 후에 들은 소문에 의하면 동양인으로서 면허 소지자로 배의 사무직에서 처음 근무하게 되었다 하여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했었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중국인으로서 요리사로 배에서 근무하던 분들이 한 두 명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배에서 근무하는 이들은 전부 백인들 뿐이었다.
 
Tug Boat 선정면허는 선장면허증 중에 하급면허이고 그 위로 을종과 갑종선장 면허가 있다. 한국에서부터 갑종선장면허를 소지하고 있었지만 이 면허는 캐나다에서는 인정되지 안아 병종 선장-을종일등항해사- 을종선장- 갑종일등항해사- 갑종선장의 다섯종류의 선장면허시험을 차례로 응시하여 1979년에 갑종선장면허를 취득하게 되었고 우리 회사에서는 유일하게 갑종선장 면허소지자로서 근무하게 되었다. 자랑을 하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3주 승선을 하고 3주 집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즐거움은 가정이 안식처라 이름하기에도 부족하다. 그 동안 헤어져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귀여운 세 딸과 언제나 내가 집에 없는 동안 아디들을 돌보고 분주하게 풀 타임으로 직장생활하는 아내는 아버지와 어머니 역활을 도맡아 하며 비어 있는 가장의 자리까지 메꾸어 가면서 바쁘고 힘든 생활 속에서 내가 20년 이상 승선업무를 무탈하게 내조해 준 숨은 공로가 있었기에 오늘의 안정된 은퇴 생활을 하게 할 수 있었다는 고마움에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고 온 가족에게 감사하다.
 
이민초기에 안일한 한국생활로부터 이탈하여 일시에 변화된 이국 이민 생활의 뼈를 깎는 아픔과 언어의 장벽을 감내하여 정착을 위한 험준한 고난의 역경을 딛고 서구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드리는 생활 습관에 적응하기까지는 오랜 세월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캐나다에 정착하여 안정된 삶을 갖기 위한  노력과 열성과 결단이 이러한 고난을 통하여 헤쳐 나갈 수 있는 무기로 삼을 수 있었기에 아내는 이 곳에서 적진을 향햐 돌진하는 모습으로 언어 이해력 부족으로 인해 감당할 수 없는 기술을 배우기 위한 컴뮤터 사용 능력을 습득하는 6주 과정의 기술학원에서 배움을 끝낸 직후 Woodward 라는 백화점에서 곧바로 직장을 얻게 되어 그 곳에서 20년 동안 Office Clerk 으로서 그 회사가 문을 닫을 때까지 일하고 은퇴하게 되었다.
 
아내는 말하기를 일하는 동안 힘들었지만 많은 캐나다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동안 의사소통도 원활하게 되고 이 곳 사람들의 생활습관을 알고 배우게 되고 이해할 수 있는 면식이 생겨 사람들을 대하기에 불편함이 없는 이로운 것을 배우게 되어 참 다행이었고 하나남의 은혜로 기쁘고 즐거운 시간들이었다고 회상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한국사람으로서 첫선을 우수하게 보인다는 각오로 나뿐만 아니라 이곳으로 이주한 소수의 우리 교민들이 이민 개척자로서 삶을 살며 각 분야에서 이렇게 열심히 성실하게 피땀 흘리며 일하였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말씀 드리기에 많은 양해를 부탁드리는 바이다.
출처: 월목회 3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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